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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86

문화적 불연속성을 탐구하는 다큐멘터리의 전략 이주와 이산의 경험이 인간 정체성을 구축하고 표현하는 방식은 현대 다큐멘터리의 주요 의제들 중 하나와 연결된다. 초국적인 세계 체제하에서 이주 및 문화적 연속성, 불연속성의 경험을 다루는 최근 다큐멘터리들은 영상 사회학적인 민족지 작업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식민주의의 영향을 다양한 맥락으로 제시하는 영화들 가운데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현재의 정치, 사회적 구조하에서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의 흔적을 새기는 방법으로서 다큐멘터리를 활용하는 작품들이다. 반(反) 식민주의 다큐멘터리 (Nous, 2021)는 서유럽 사회 안에서 인종주의적 권력의 역학관계를 소재로 한 이야기이다. 1960년대 유럽으로 이주한 세네갈인 부모 슬하에서 태어난 여성 감독 알리스 디옵은 이민자의 정체성을 가진 프랑스 시민의 지위에 대해 탐.. 2022. 12. 11.
예술의 힘을 되찾기 위한 몇 가지 사유 인접한 다른 도시에서 인천까지, 한동안 매일 아침을 바쁘게 오가며 인천1호선 역사 내 한 벽면을 가득 채운 전광판에 나오는 도시 홍보 영상을 자주 보았다. 역동적인 화면을 연출한 영상이 반복해서 보여주는 인천은 ‘최초’의 무언가가 넘쳐흐르는 도시이며, 그 슬로건으로 ‘모든 길은 인천에서 시작되었음’을 제시한다. 사람과 사물이 그리고 도시를 형성하는 모든 것이 들어오는 동시에 어디론가 다시 나가는 도시인 인천은 외부인이 바라보기에 언제나 흘러나가는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인천은 스스로 만든 경로를 거쳐 나가고 마침내 ‘다시 돌아오는’ 곳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넌지시 내비치고 있었다. 이러한 열망을 품은 도시에서, 한국 이민사 ‘최초’로 공식 기록된 1902년 인천 제물포항을 떠나 하와이에 도착한 이민 1세.. 2022. 12. 11.
장소의 기억: 2022 부산비엔날레에서 본 디아스포라 인구와 물자의 이동이 용이한 지리적 위치에 있는 지역, 특히 항구를 끼고 있는 도시들은 다양한 사람들과 다채로운 일들이 한데 어울려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한반도는 근대로 접어들어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세계를 받아들이고 외부세계로 나아가게 되었고, 그렇게 시작된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개항과 함께 시작되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최초의 개항장이 된 부산은 일제강점기, 근대화, 해방과 한국전쟁, 산업화를 거치면서 많은 이들을 받아들이고 떠나 보내며 시간의 축적과 함께 디아스포라의 범위와 해석을 확장해왔다. 물리적 이동으로부터 시작되는 디아스포라는 장소를 통해 사람들과 연계하고 상황들을 마주한다. 2022 부산비엔날레는 부산이 겪어 온 역사적 장소에 기반에 두고 이주, 노동과 여성, 도시 생태계, 기술.. 2022. 12. 11.
부산국제영화제(BIFF)의 '동네방네비프'에 대한 비판적 고찰 누군가 우리에게 한국 문화의 정체성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분명 난감할 것이다.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엄밀히 말하면 그간의 학습된 지표들이 무수히 떠오르지만, 이미지들의 기원을 추적해 볼수록 의문은 더 커질 뿐이다. 정체성은 자연 발생적이었을까, 국민국가와 지자체 정책의 발명품일까, 이 기호들을 어떻게 범주화 할 수 있을까 등. 이런 당혹스러운 고민을 하는 와중에도 문화적 정체성과 관련한 담론은 동시적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 중이다. 가장 가깝게는 K-문화 패러다임이 증식 중인데, 주로 경제적 이익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K-문화는 다종다양한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K라는 알파벳 하나로 압축하여 진귀하고도 간편한 방식으로 세계 곳곳으로 파생되고 있다. 그 압축의 유의미함에 대해 그다지 진지한 논의가 펼쳐지지.. 2022. 12. 11.
지역으로의 일시적 개입 20세기 후반 이후의 유례없는 세계적 팬데믹의 발생은 지금까지 당연하다 여긴 삶의 방식들을 바꾸어놓았다. 마음만 먹으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던 시절이 한때였듯, 모든 물리적인 이동에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뗄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지난 3년간의 고된 여정은 도리어 어떤 반작용으로써 새로운 방향으로 길을 열기 시작했다. 오프라인 대신의 온라인 커뮤니티가 더욱 활성화되었고, 새로운 기술과 프로그램을 시도하며 다른 대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또한 장거리 이동의 제약으로 자신의 거주지와 직장이 있는 장소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였다. 지역, 지역 공동체, 로컬리티 등에 관련한 연구와 토론의 장이 보다 활발하게 열렸고, 지역을 기존의 개념과는 다르게 접근하여 개입하려는 움직임이 여러 곳에서 포착되었다.. 2022. 12. 11.
물값을 달라고 했을 때 벌어지는 일들 (강/바다) 물을 사고파는 이야기 우리는 강물을 사고팔았다는 어떤 이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김선달이라는 인물이며, 김선달이 대동강을 거래했다는 이야기는 그이에 대한 설화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김선달은 어느 날 평양의 대동강 앞에서 물을 길어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는 척 연기를 한다. 이를 본 돈 많은 외지인은 의아해하며 뭘 하는지를 물었고 김선달은 이 강이 자기 소유라서 이곳의 물을 팔고 있다고 한다. 이에 욕심이 생긴 외지인은 큰돈을 주고 김선달에게 대동강을 산 뒤, 이튿날 물을 길어온 평양사람들에게 물값을 내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그 외지인이 미쳤다고 여길 뿐 돈을 내지 않았으니, 그제서야 외지인은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워.. 2022. 9. 25.
디아스포라의 고통받는 얼굴을 보라 얼굴, 벌거벗은 고통이 당신 앞에 닥쳐온다. 고통받는 얼굴은 주체의 ‘상처입을 가능성’(vulnerability)에 호소하며 우리에게 응답할 것을 ‘명령’한다. 고통받는 얼굴의 도덕적 명령, 내가 내 삶의 주인이고, 나는 오로지 나만을 위해 살겠다는 독단적 자유에서 벗어나라는 명령. 그 명령에 응답하는 자와 외면하는 자. 기꺼이 상처받으려는 자와 상처를 두려워 하는 자.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에게 윤리적 주체란, 이 고통받는 얼굴 앞에서 자신도 함께 상처 입겠다며 손을 내미는 주체, 타인의 고통에 대한 책임에서 도망치지 않으려는 주체, 그리고 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려는 주체이다. 자신의 ‘상처입을 가능성’을 기꺼이 타인에게 내어주는 것. 그럼.. 2022. 9. 25.
표류에 기울이는 말 세월이 짙은 이야기를 마주할 때면, 그 두터움을 섬세히 다룰 여러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섣불리 내릴 판단을 유예하고 이야기를 들어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며 계속해서 변모하는 디아스포라 역시 그렇다. 그중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개화기 하와이 이주를 시작으로 중국, 일본, 연해주 그리고 또다시 중앙아시아 등지로 향한 이들의 몸이 조선/한국이라는 경계를 갖고, 도착한 땅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낸 것을 일컫는다. 초기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다룬 미술이 이러한 표지를 지닌 작가가 이주한 장소를 관찰하며 낯선 일상을 그려내거나, 이를 통해 자기 고백적이고 역사화 된 경험을 기록하는 방식을 취했다면, 2010년대 이후 작가들은 세대를 건넌 뒤 맞닿은 현재의 디아스포라를 이해하는 과정에 참여하.. 2022. 9. 25.
욕망 주도 기계 - '공장달리기 인천' 이후 돌아보는 신체의 기계성 미국 철학자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가 제시한 기계지향론적 존재론(machine-oriented ontology)에 의하면 우리가 '존재'라 칭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기계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들뢰즈/가타리의 머시니즘(machinism)이 놓여있다. 이것은 작동하는 모든 것이 기계(machine)라는 주장인데, 생명을 가지는 것들을 포함한다. 보다 일반적 의미에서의 기계, 우리가 평상시 기계라 부르는 바로 그 비생명체들의 작동 원리를 일컫는 메커니즘(mechanism)과는 구분하기 위해서 도입된 명칭이 바로 머시니즘이다. 이 이론은 입이나 항문이 어째서 기계인지를 예로 드는데, 어떤 유기적 흐름에 개입하여 그것을 절단하거나 채취하는 것이 곧 기계라는 정의가 따른다. 이 주장에서 반복적으로.. 2022. 7. 31.
실제보다 리얼한 : 다르덴의 영화 속 이민자의 형상들, 변화들 영화에서 타자를 재현하는 방식을 둘러싼 윤리적인 문제가 첨예하게 대두된 적이 있다. 타자를 대상화된 시선으로 재단하진 않았는지, 그렇다면 어떻게 재현해야 옳은지에 관한 논의가 이어졌다. 최근에는 타자 재현을 둘러싼 윤리적인 문제가 예전만큼 중요하게 부각되지 않는다. 타자가 올바르게 재현되어서가 아니라, 타자의 개념과 위치가 변화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타자는 그저 타자의 얼굴을 한 자아로 흡수되거나, 집단화된 비인간이 되었다. 어떤 경우 타자는 두드러지게 좋은 얼굴로 재현된다. 의 자인은 실제 난민 소년을 캐스팅했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또래 배우로서 보기 드문 카리스마를 지닌다. 에서 안티고네의 사연이 대중의 지지를 얻으면서 그의 몽타주가 복제되고 상품화되는 현상은 때로는 누군가의 불행이 좋은 얼굴을 뒷받침.. 2022. 7.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