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뷰86

어쩌면, 모두의 고양이 역세권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한적한 구도심 주택가, 오가는 사람 없이 텅 빈 광장을 품고 쇠락해버린 재래시장 창고 건물 한 켠에서 전시가 열리고 있다. 안쪽을 드러낸 빈 건물 사이를 뚫고 지나다니는 바람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초겨울, ‘냥들의 친목 두 번째 이야기, 수봉냥이들’ 전시는 이곳을 따뜻하게 만들고 있는 중이다. ‘냥들의 친목, 두 번째 이야기’전은 봄(3.18~4.20)에 배다리 조흥상회 2층 생활사 전시장에서 진행됐던 ‘냥들의 친목’ 전시(참여작가 비니, 이니, 웅이, 지니, 청산별곡, 쿠로, 하미)의 2탄 격이다. 냥들의 친목은 냥이와 멍이의 집사로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나누는 소소한 친목모임으로, 전시에 참여한 7명 모두 집사들이다. 첫 번째 전시가 집사들이 반려.. 2021. 1. 3.
밤이 되어 비로소 그것이 질긴 껍데기인줄 알았다. 백승섭 작가의 전시장에 가는 길, 어두운 구름이 점점 쌓이더니 아침에 확인했던 일기 예보보다 먼저 비가 내렸다. 작가의 전시 정보를 알리는 플래카드 위로 떨어진 빗방울들은 그가 말하는 ‘껍데기’를 더 질기게, ‘밤’을 더 어둡게 만들어주는 듯했다. 지하에 위치한 제물포 갤러리의 전시장은 이날의 날씨와 퍽 잘 어울렸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어두운 화면 위로 흘러가는 어떤 것들이 가득 차 있다. 그것들은 작품의 틀에 겨우 멈춤을 시도할 뿐이고 여전히 잔잔하게 흐르는 형상으로 존재한다. 작가는 이 형상에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말하지만 분명하고 큰 움직임이 보였다. 어두운 바탕을 지나간 연필, 콘테, 먹 등의 재료들 역시 어두운 색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뚜렷이 말하고 있었다. 작가는 보통 존재하는 것은 ‘너.. 2021. 1. 3.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을 다녀와서 요즘 인천시 중구는 인천개항장 당시의 근대건축물 복원이 한창이다. 그중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의 기원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활동하던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1877년 9월 일본에 제18국립은행을 설립하였고, 1882년에는 조선에 부산 출장소를, 1889년에는 청국 상해지점을 개설하였다. 그 후 나가사키 상인들은 상해에 수입되었던 영국 면직물을 수입하여 국내 인천항에 다시 수출하는 중개무역을 영위함으로써 인천과의 무역량 증대로 큰 이익을 거두고, 사업이 번창해 감에 따라 당시 수출무역의 중심지였던 인천개항장에 국내 최초의 지점인 일본 제18은행 인천지점을 건립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 현재의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을 개관하였다. 인천개항장은 지역전체가 역사적 사실 보존 지역으로 넓은 영역을 차지하지만.. 2021. 1. 3.
예술가의 자격 “관객들은 그 장면을 보고 싶어 한다니깐?” 대학 시절, 국어교육을 전공하던 나는 영화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원대한 꿈을 안고 영화과 복수 전공을 시작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향해 날카로운 칼을 들이대는 사람들일 거라던 나의 순진한 믿음은 영화제작 수업을 들으며 와장창 깨졌다. 수업은 시나리오부터 촬영, 편집 단계까지 각자의 결과물을 공유하고 교수와 학우들의 합평으로 진행되는 수업이었는데, 말이 좋아 합평이었지 사실 교수의 입맛대로 영화를 바꾸는 수업이었다. 한 친구는 자신이 어릴 적 성폭력을 당했던 일을 극복하고 싶다며 시나리오를 써왔는데, 교수는 성폭행 장면이 꼭 들어가야 한다며 친구를 닦달했다. 급기야 교수는 남학우들을 한 명 한 명 지목하며, 그 장면이 보고 싶지 않냐고 캐묻기까지.. 2020. 12. 27.
서사가 스민 공간 어떤 공간이든 절대적으로 ‘빈 공간’이란 없다. 비어있을 수 없다. 현재의 소리, 향, 이미지. 온도, 사람, 물건들이 공간 안에 머물러 있다. 과거의 공간 또한 마찬가지이다. 절대적으로 기억할 순 없지만 머물러 있던 시간이 있고, 기억이라는 엄청난 것이 존재하고 줄곧 있어왔다. 공간은 사람을 의미한다고 했던가. 숨 쉬고 생각하고 실천하고 머무는 자리마다 살아온 시간과 어떠한 역사를 대하는 태도, 생각이 스며있다. 각자의 서사가 스민 공간을 캔버스에 꾹꾹 담아내는 고진이 작가의 작품에는 작가의 기억만이 아닌 작품을 보는 이로 하여금 과거의 그것을 스스로 끄집어내어 새롭게 쓰는 또 다른 서사가 그려진다. 달그락달그락 접시와 포크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린다. 너나할 것 없이 쏟아낸 자신의 서사들로 .. 2020. 12. 27.
다수의 시간과 사건, 여기 인천아트플랫폼 유치원생인 막내가 ‘BTS’의 노래를 틀어달라고 한다. 방탄소년단 춤을 배웠는데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다. 온 가족이 기대에 차서 막내를 보기 시작했는데 두 마디를 꼼지락거리더니 차렷 자세로 멈추어 선다. 왜 멈추는지 묻자 오늘은 여기까지 배웠단다. 아이들은 9월부터 송년 발표회를 위한 공연을 준비한다. 부모님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어려운 동작도 열심히 따라 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풍이 들었다 낙엽이 돼 바닥에 뒹굴고 첫눈이 내리는 시간만큼 아이의 춤 실력은 쌓였다. 두 마디에서 한 곡 전체를 출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2019 레시던시 입주작가 결과보고전 이 열리는 인천아트플랫폼으로 향하던 날, 유치원에서 배운 데까지 가족에게 보여주던 막내의 얼굴과 칭찬을 잔뜩 기대하던 자신만만한.. 2020. 12. 27.
proper farewell ‘공동체’라는 주제어를 가지고 총 10팀이 각자 제작한 평면. 입체작품과 퍼포먼스를 모아 연출한프로젝트의 전시공간은 철거를 앞둔 작가의 옛집이었다. 참여 작가들은 가족 내의 갈등과 공감, 창작자 커뮤니티에서의 긴장과 동지애, 구시가지의 비애와 그 특유의 애틋한 아름다움 등, 사회적 관계를 다각도에서 바라보는 작업을 선보였다. 이 프로젝트에서 다루어진 공동체는 언제든 해체될 위험에 처해 있거나 이미 해체되는 과정 중에 있는 불안한 연대였다. 공동체 내부의 갈등으로부터 나타난 해체의 조짐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상황의 변화 즉 외부로부터의 압력에 의해 위기를 맞은 공동체였다. 하지만 이를 그려내는 이들의 작품에는 ‘우리는 왜 힘이 없는가, 왜 우리는 힘이 없는 존재이도록 내버려졌는가’ 하는 원망의 시.. 2020. 12. 27.
인천에 남아있는 공장 건물, 미래 자산으로 바라봐야 인천을 묘사할 때 자주 쓰이는 단어가 ‘회색 도시’이다. 1960년대 국토개발 전략을 바탕으로 공업 도시로 급성장해 공장 건물이 많아서다. 그런데 회색 도시를 만들었던 공장이 역으로 개성 있는 도시로 거듭나는데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곳이 있다. 인천 서구 가좌동에 있는 코스모40(Cosmo40) 이야기이다. 코스모40은 공장 건물이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곳으로, 2년 전까지는 (주)코스모화학의 황산 재처리 공장으로 기능했다. 그러다 2016년, 45개 건물이 있던 공장 단지가 다른 곳으로 이전이 결정되면서 가동을 멈췄다. 빠른 속도로 건물 들이 철거되었고 40동 건물이 마지막으로 남았다. 이마저도 철거될 예정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보던 (주)에이블커피그룹이 건물과 공장 일대 부지를 매입했고, 4.. 2020. 12. 27.
인천서점을 다녀와서 1. 인천서점을 다녀와서 2016년 일년간 레지던시 입주작가로 생활하다가 2018년 12월 오랜만에 인천아트플랫폼을 방문했다. 거의 2년 만에 와보니 여기저기 공공미술작품들이 새로 생기거나 사라진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커피숍이 있던 자리에는 인천과 관련된 주제의 책들을 한곳에서 볼 수 있는 서점이 생겼다. 인천서점이라는 이름이 서점의 성격과 꽤 잘 어울리는 이름 같았다. 개항지로서 국내에서 외국의 문화를 가장 먼저 받아들이고 그것을 다시 전국으로 퍼뜨리는 출발점이 되어왔던 인천, 지금도 세계의 여러 인종들이 쉼 없이 드나들며 서로 간의 문화가 겹치고 뒤섞이는 인천에 대한 책들을 한곳에서 수집함으로써 쉽게 정보를 보존하고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것은 매우 뜻깊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지역.. 2020. 12. 20.
조심스레 전해지는 여전히 고된 삶 요즈음은 좀 여러 면모가 알려지고 있다곤 하지만, 인천은 오랫동안 공장의 도시이고, 그래서 노동자의 도시였다. 인천이 현대사에서 주목받는 시점에는 항상 공장과 노동자들이 있었다. 해방부터 산업화에 이르는 동안에는 항구와 고속도로를 따라 늘어선 공장은 곧 인천의 상징이었고, 민주화의 시간에는 5월 항쟁, 동일방직, 노동자 대투쟁과 같은 단어들이 인천을 역사의 중심으로 가져다 놓았다. 그러나 이 공장과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삶은 개개인의 기억에 남았고, 역사의 한 장이 되지는 못했다. 2017년 국립민속박물관의 ‘인천 공단과 노동자의 생활문화’라는 학술조사를 바탕으로 기획된 은 ‘2019년 인천 민속문화의 해’를 위한 특별 전시이다. 이 전시는 민속문화를 과거에 놓아두지 않고, 현대 노동자의 삶이 현재의 민속.. 2020. 1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