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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함께 그림 그리실래요?

by 동무비평 삼사 2021. 1. 3.

나는 매일 그림을 그린다. 딱히 정해진 시간은 없다. 집에서도 그리고 버스나 지하철에서도 그리고 카페에서도 그리고, 공원에서 그린다. 가끔은 길바닥에 주저앉아 그린다. 따로 정해진 주제가 있는 것도, 고집하는 재료가 있는 것도 아니다. 연필이든 펜이든 손에 잡히는 재료로 그리고 싶은 걸 그린다. 무엇이든 하루 한 장이다.

내가 데일리드로잉을 시작한 것은 대략 10년 전. 친구의 권유 덕이었다. 낙서처럼 하루 한 장 끄적여 SNS에 올리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었다. 그게 재미있어서 계속 그렸다. 아무리 바빠도,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셔도, 하루 한 장 그리기는 계속했다. 잘 그리기 위한 그림, 목표가 있는 그림이 아니니 부담 없이 이어갈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다. 오래도록 지켜보고 그것을 종이에 옮기다 보니 나 아닌 존재에 대한 새로운 감각이 깨어났다. 자세히 보면 예쁘고, 오래 보면 사랑스러웠다. 세상 모든 존재가 그랬다.

 

무언가를 꾸준히 반복하는 것은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그보다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이 훨씬 재미있다는 게 평소 믿음이었다. 그러나 데일리드로잉을 통해 꾸준한 반복을 경험하면서, 반복에 대한 평소의 생각과 믿음은 깨졌다. 반복은 그냥 반복이 아니었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면서 그것은 나의 살갗이 되고 나의 숨이 되었다. 습속이 되고 일상이 되었다. 데일리드로잉은 나의 삶을, 일상을 변화시켰다. 일상을 바꾸고 습속을 바꾸는 것. 이것은 어쩌면 혁명보다도 더 큰 변화다.

 

10년 동안 데일리드로잉을 하면서 그림 그리는 친구들을 많이 사귀게 되었다. 나이와 성별도 제각각, 한국뿐 아니라 지구 반대편에 있는 친구들도 있었다. 언어가 달라도 그림이라는 언어가 있으니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는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모든 차이를 뛰어넘어 친구가 될 수 있게 했다.

 

그림 그리는 친구들 중에는 나처럼 매일 그리지는 않지만 일상의 풍경을 직접 보고 그리는 어반스케쳐(Urban Sketchers)’들이 있었다. 어반 스케쳐들은 세계 각 도시에서 모임을 갖고 함께 그림을 그렸다. 한국에도 서울, 수원에 모임이 있기에 특별한 고민 없이 어반스케쳐스 인천 모임을 만들고 한 달에 한 번 스케치 정기모임을 가졌다. 벌써 6년이 넘었다. 함께 그리니 그리는 재미는 두 배 세 배로 커진다. 한 달에 한 번 정기모임 외에도 화요일무조건11시드로잉, 금요드로잉 등 요일별 모임이 생겼다. 그만큼 그리고 싶은 이들이 많았던 것이리라.

 

정기적으로 그림 그리는 모임이 생기니 그리고 싶은 욕구를 마음 속에만 담아두었던 이들이 하나둘 집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던 한 친구는 매일 그리는 습관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 시기를 통과하지 못했을 거라 고백하기도 했다. 또 다른 친구는 임신과 출산 이후 깊은 무력감에 빠져 있었는데 아이가 어린이집에 있는 시간 동안 사람들을 만나 그림을 그리며 활력을 얻었다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그림을 그리는 시간만큼은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다. ‘몰입의 순간이다. 몰입의 순간을 여럿이 함께 하면서 개인의 경험이 공동체의 경험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어반스케쳐스 인천 활동을 하면서 의외의 소득이 하나 더 생겼다. 매주 혹은 매달 만나는 장소를 정하려고 하다 보니 인천을 알아야 했다. 오로지 그리기 위해 다닌 장소들은 지금까지 수십 년 살면서 알았던 것보다 인천에 대한 더 많은 정보와 관심을 선물했다. 나 또한 인천에서 20년을 살았지만 인천에 대한 관심도 애착도 그다지 없었는데 사람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면서 인천에 조금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그렇게 돌아다녔는데도 인천에는 아직 가보지 못한 곳, 모르는 곳이 더 많으니 설레는 일이다.

 

데일리드로잉은 혼자 하는 프로젝트이고 어반스케치는 여럿이 함께 하는 프로젝트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온라인을 통해 공유된다. 그림은 다분히 개인적인 행위이지만 온라인에서 그림을 나누고 함께 그리는 행위는, 이전에 문자언어 혹은 음성언어로 맺던 관계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관계 맺기의 경험을 안겨 주었다. 기존의 차이와 위계를 뛰어넘는 공감의 언어를, 드로잉을 통해 배웠다.

 

데일리드로잉, 어반스케치 10. 별 다른 성취는 아니지만 이 재미있는 반복을 지속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더 많은 이들과 그리기의 즐거움을 나누고 싶다. “우리, 함께 그림 그리실래요?” [ ] 

 

마법사

 

Urban Sketchers’ Manifesto

1. 우리는 실내외의 현장에서 직접 보고 그린다.

2. 우리의 드로잉은 여행지나, 살고 있는 장소, 주변의 이야기를 담는다.

3. 우리의 드로잉은 시간과 장소의 기록이다.

4. 우리가 본 장면을 진실하게 그린다.

5. 우리는 어떤 재료라도 사용하며 각자의 개성을 소중히 여긴다.

6. 우리는 서로 격려하며 함께 그린다.

7. 우리는 온라인에서 그림을 공유한다.

8. 우리는 한 번에 한 장씩 그리며 세상을 보여준다.

 

* 어반스케치는 매니페스토에 준해 누구든 즐길 수 있는 활동이며 별도의 자격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 본 노트는 2019년에 작성한 원고입니다.

* 이미지는 필자가 작가에게 제공 받았으며, 사용 허가를 받고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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