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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당신의 혀 위에서 녹은 하얀 결정체

by 동무비평 삼사 2021. 10. 31.

현대미술에 대해 대부분의 일반 관객들은 도저히 알아먹을 수 없다는 당혹감을 숨기는 데에 익숙해 있지만, 이 전시의 제목은 공통의 감각을 불러내어 우선 안도감을 선사한다. 단맛과 짠맛. 이 시대의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설탕과 소금에 대해서는 예술과 별개로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소위 현대인에게 무절제의 상징으로, 건강의 위협으로,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의 ‘단짠단짠’ 유혹으로 와 닿을 이 흰색 가루들을 어떻게 작품으로 풀어냈을까. 기대와 호기심을 품고 문래동 술술센터로 향했다. 

전시가 개최 중인 문래동의 술술센터는 문래창작촌에 위치한 예술·기술 융·복합 문화공간으로, 과연 예‘술’과 기‘술’의 만남을 표방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위치에 있었다. 주변 문래기계금속지구에는 수많은 공장이, 문래창작촌에는 130여명의 아티스트가 공존하고 있다고 하니, 예술가와 노동자가 부디 스스로와 서로의 노동에서 소외되지 않고 협력을 주고받는 장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장소성의 의미를 되새기며 자연의 산물에서 인간의 노동력이 더해져 공산품이 된 상품,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결정체 ‘설탕과 소금’의 이야기를 만나기 시작했다. 

특이하게도 지하 1층에서 4층, 2층으로 동선이 짜여 있었다. 전시해설대로 이 전시는 “설탕과 소금의 중독적인 소비 현상부터 이것을 매개로 연결된 근대화 과정, 세계화, 사회 현상, 환경문제 등”을 주로 탐구하고 있다. 화이트큐브가 아닌 공간에 각 작품들이 자리하고 있고 그 형태도 미디어, 오브제, 책자, 병풍, 드로잉, 디지털 프린트, 게임 등 다양하다. 

지하 1층의 전시는 문형민 작가의 인터랙티브 설치로 시작된다. 단짠과 소금, 설탕 등과 관련된 단어를 선택해 유튜브에서 수집하는 프로그램을 실시간 운영하는데, 작품은 유튜브에서 나오는 순위별로 면적이 구성된 컬러 칩, 픽셀들의 조합처럼 보이는 이미지로 출력된다. 작품의 정제도가 너무나 높아서 해설이 없었다면 그저 추상화된 모자이크로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작업 과정 자체가 오히려 고도로 정련된 정제당이나 정제소금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키요코 사카타의 작품은 재일조선인의 시의 구절을 인쇄한 문자 위에 소금 결정을 하나씩 내려놓는 영상으로, 반짝이는 소금 알갱이는 마치 눈물도 말라버리고 결정체만 시구로 남아버린 타국의 이방인 같았다. 조국으로 가기 위해 바다를 건너려 하면 녹아버리게 되는 존재. 

4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창문에 붙은 탕 마오홍의 드로잉 <조물(造物)>로 전시가 시작된다. 보통 설탕과 소금은 우리가 섭취하여 몸 안으로 들어오지만, 그는 신체에서 설탕과 소금을 추출하는 불가능한 반대 경로를 상상해 보았다고 한다. 중국 고전에나 나올법한 고풍스러운 이미지에 재미있는 상상력이 더해져 잠시 기서(奇書) 한 장을 들춰본 듯 했다.

 

 

이어지는 창문의 전시는 김화용 작가의 <화성에도 짠물이 흐른다>로, 흐릿한 인쇄상태와 달리 매우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꽂아 넣는다. 다양한 자료를 통해 수집한 소금에 관한 정보들을 문자로 인쇄하여 창문에, 벽에, 전시대에 배치했는데 담담한 서술 속에는 한국 근현대사의 아픈 이야기로 가득하다. ‘짠물’의 대명사로 불리는 인천의 풍경도 여러 번 호출되었다.

 

 

김지평 작가의 <두 개의 신화>는 과거 구전설화와 현대의 건강신화가 겹쳐진 작업으로, 각 이미지들을 6폭 검은 병풍에 배치해서 마치 현상된 필름 같기도 하다. 소금장수 옛날이야기 위에 현대 소금 광고 이미지를 덧그린 20여점의 작품들은 쉴 새 없이 의미가 부딪히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신화’란 제목에서 말하듯이 이 작품은 당대의 믿음이 정상적인 것으로 수용되는 세계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것은 여론을 주도하고 전달하는 소금장수의 권위나 건강과 자연, 지역 특산물을 강조하여 소비자들의 신뢰를 창출하는 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암시한다. 

<천공개물 연작> 첸 칭야오의 작품은 어떤 의미에서 이 전시의 장소성에 가장 어울리는 것이다. 명말청초(明末淸初) 시기 서적 「천공개물天工開物」은 모든 산업 부문을 망라한 산업백과사전으로, 중국 재래식 산업 기술이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작가는 이 책에 나온 장면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바뀐 산업구조와 현재의 문제들(이주민 노동자 등)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가오슝에 있는 작가의 동료 스튜디오에서 촬영되었는데, 그곳은 과거 설탕공장이었다고 한다. 쇠락한 공장시설이 예술가들의 창작공간으로 재탄생하는 수많은 예 중 하나로서, 이 전시가 이루어진 술술센터의 장소성과도 이어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전시를 기획한 임종은 큐레이터는 술술센터를 전시공간으로 택한 이유에 대해, 문래동은 영단주택이 지어졌던 곳으로 식민 역사와 그 이후 산업화의 현장으로서 한국이 경험한 흔적과 기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이완 작가의 <메이드 인 대만>과 이루완 아멧&티타 살리나의 <케팔랑 카팔란(오랜 굳은 살)>, 엘리아 누르비스타의 <서커 주커>야말로 이 전시에서 주제의식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작품들이 아닌가 한다. 설탕과 소금을 생산하기 위해 가려진 노동의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이 가루가 불러온 아픔(제국주의의 수탈과 자본주의의 착취 모두)과 전지구적 움직임, 지역민과 환경의 파괴, 아시아의 쓰디쓴 근현대사를 모두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착취는 현재 바로 우리, 소비자에게까지 이어진다. 발톱이 빠져가며, 손과 발을 베어가며 높은 곳에 올라 힘겹게 수액을 채취하고 사탕수수를 수확해 정제하는 것은 노동자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정당한 대가를 주고 가격을 지불한다고는 하지만, 감각의 쾌락을 위해 불공정한 타인의 노동과 환경파괴를 계속 강요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생존을 위해서든 더 나은 맛을 위해서든 이 미각을 결코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광대한 주제에 비해 극히 일부만 다루어진 것 같은 이 전시의 아쉬움은 앞으로도 새로운 변주를 계속해주기를 바라는 기대로 마무리 짓는다. [ ]

 

소요유

 


설탕과 소금
기간: 2021.09.02. - 2021.09.26.
작가: 김지평, 김화용, 노승복+신판섭+쏠티 캬라멜, 문형민, 이완, 탕 마오홍, 이루완 아멧 & 티타 살리나, 엘리아 누르비스타, 첸 칭야오, 키요코 사카타
장소: 술술센터
기획: 임종은
협력기획: 김정현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영등포문화재단
참고: 2021 아르코 시각예술창작산실 우수전시 선정작

 

 

*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했으며, 사용 허가를 받고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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