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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항구로부터, 신호

by 동무비평 삼사 2021. 9. 26.

#1 항구로부터, 신호

이 전시는 세상의 무수한 항구들과 신호들에 관한 이야기다.

모든 항구는 신호들을 끌어당기지만, 그중 어떤 항구는 힘이 너무 강해 블랙홀처럼 신호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가두어놓는다.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고 모든 게 다 끝난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어떻게 바닥으로부터 새로운 신호를 만들어 밖으로 보낼 수 있을까? 아주 멀리에서 너무도 느리게 움직여서, 존재하는지 알아차리기도 어려운 신호들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거대한 힘의 방향과 성질을 달라지게 할 수 있을까? 

<환대의 조각들 2021 - 항구로부터, 신호> 전시소개 글 중에서

 

 

신호와 함께, 걷기 Wifi 화면 

#2 신호와 함께, 걷기

2021년 7월 10일 강정마을 해군기지 로터리에 울리는 와이파이 신호음. 

‘우리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군사훈련 즉각 중단하라!’ ,‘청정제주를 쓰레기로 오염시키지 마라!’ 스피커를 통해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모바일 인간 띠)와 함께 <항구로부터, 신호>의 전시 연계프로그램인 ‘신호와 함께, 걷기’가 시작되었다. 도로 위 표시판에 보란 듯이 쓰여있는 해군기지 로터리를 보며 행진한다. 어느 밤 바다를 가로막은 펜스와 경찰들을 마주하고 무서움이 떨던 시간과 장소가 떠올랐다. 나를 아주 오랜만에 강정으로 이끈 ‘신호’라는 말을 입속에서 빙빙 굴려본다. 한 사람은 스피커를 손에 들고 다른 한 사람은 휴대전화로 와이파이에 얹힌 신호를 반복해서 재생한다. 나는 걷기가 시작되었을 때 받은 실로폰 장치를 열심히 움직이며 와이파이 신호들과 조화를 이루고 싶었다. 신호들에 귀 기울이며 강정 앞바다까지 함께 걸었다. 강정천을 따라 강정 앞바다에 이르기까지 무참하게 폭파되었던 구럼비 바위를 떠올렸고, 뜨개질 행동에 참여했던 겨울이 떠올랐다. 환멸감이 압도하여 무력감을 느끼던 시간과 장소들을 지나 삐추새 소리와 열매들을 소개하는 상냥한 사람들의 뒷모습에 감탄하였다. 

 

 

 

<항구로부터, 신호> 전시 전경

 

 

 

#3 환대의 조각들

문화공간 비수기는 강정 평화 상단의 감귤 선과장으로 비수기 동안 문화공간으로 운영된다. 나무상자와 움직임이 그려지는 벨트장치가 감귤 작업이 한창일 때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그곳에도 실로폰 장치가 만들어내는 소리가 바람이 느껴질 때마다 들린다(이곳에 잠깐 놓아두려고요, 신원정). 환대의 조각들 전시장마다 입구에서 사람들을 맞이해주는 수어 해설 영상과 점자 리플렛, 큰 글자 리플렛(한글/영문)이 어김없이 있다. 차곡차곡 쌓여있는 색바랜 감귤 상자들에 상영되고 있는 영상들을 보았다(NO SIGNAL, blblbg). 2011년 3월 도호쿠 대지진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무언가에 홀리듯 그곳에 방문하게 되었다는 작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가 무참하게 쓸려간 폐허 속 그곳에서 경험했다던 환대의 시간을 따라가다 보니 2019년 퍼레이드 진진진 영상 속에서 행진하는 사람들의 표정들과 만났다. 퍼레이드 진진진은 중증장애인을 포함한 사회적 소수자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보여주는 프로젝트이다. 바로 옆 <흘러가는 진 퍼레이드> 에서는 각자의 속도대로 자기만의 표현방식으로 그리거나 외친 300여 점의 이미지들이 온라인 행진을 이어간다. 

 

 

 

#4 식물의 수지

식물의 수지. 작품들에서 선보이는 지역의 나무들을 상상하며 만들었다는 향은 전시 공간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가지가 꺾이며 생겨나는 액이 굳어 만들어지는 수지는 식물 스스로 상처를 회복하고 자신을 보호한다는 소개를 보았다(신호가 되는 내음들, 후각디자인 김화용). 소리에서 시작해서 향으로 이어진 작품들의 이야기와 만나며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느껴질 때 어떻게 바닥으로부터 새로운 신호를 만들어 밖으로 보낼 수 있을까? 란 전시소개를 다시 떠올렸다.

 

<항구로부터, 신호> 전시 전경 

전시 이후 두 달여가 지난 지금, 나는 이 글을 준비하는 내내 다시 찾은 강정에서 만난 얼굴들, 목소리들, 몸짓들, 음식들, 소리들, 냄새들, 진동들, 빛과 색채들, 이야기 조각들이 내게 보낸 신호들을 얼마나 알아차렸는지 회고해 본다. 휠체어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 성중립 화장실, 수어 통역, 화면 해설과 같은 ‘함께할 수 있는 조건’들이 사회의 기본이 되었으면 좋겠다. 경계에서 만나는 목소리들이 신호가 되어 서로를 비출 때 나도 곁에 있고 싶다. [ ]

아랑

 

 

항구로부터, 신호

기간: 2021.06.23. - 2021.07.25.

장소: 문화공간 비수기

주최/주관: 다이애나랩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참고: 강정평화상단X비수기연구소, 인포숍카페별꼴 협력, https://fragments2021.ink/

 

* <환대의 조각들>은 사회적 소수자와 소수성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 표현을 온 · 오프라인 공간을 통해 실험하는 프로젝트로, 2020년부터 50여 명의 작가와 함께 ‘환대’라는 키워드로 각자의 조각들을 모으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https://fragments1444.ink/ 

*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했으며, 사용 허가를 받고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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