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다른 가공 없이 자연 그대로의 붉은 빛을 띄는 팥죽색, 나는 이 색을 정정엽 레드라고 불러본다. 이 색이 참으로 묘한 것이 이 불그죽죽한 빨강은 옅어지면 옅어질수록 얼굴에 덫 입혀진 발그레한 볼마냥 분홍빛을 띤다. 그래서인지 정정엽의 그림 속 인물들은 강하고 순박하고 또 억척 스럽다. 아트센터 화이트블럭에서 열린 정정엽 작가의 20번째 개인전 [걷는 달]은 연약하거나 소외된 존재들에 관심을 두면서 여성의 힘을 상징하는 ‘여성’, ‘여성의 노동’에 대한 작업을 선보인다.
‘여성’의 이야기는 매우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십상이다,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여성 한명 한명의 삶의 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 정정엽 작가는 각각의 묵직한 삶의 무게를 가진 ‘여성’들을 화면에 끌어들인다. 아니, 그들을 그림으로서 찬사를 바친다. ‘얼굴풍경 2 : 11명의 초상’ 이란 타이틀의 작업은 2009년 개인전에 소개된 이후 최근 6점이 추가된 시리즈 작업이다. 초상화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사진의 피사체가 되는 것과 달리(요즘과 같이 어떤 시각적 고민도 물리적 제약도 없이 마구 눌러지는 스마트폰 카메라는 피사체를 떠올려보자) 반복되고 덧칠해지는 붓질, 그 붓질을 가능케 하는 작가의 노동력, 대상을 면밀히 살펴 화면에 옮겨내는, 집중력 그리고 이 모든 것들 담고 있는 시간이 중첩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초상화는 동시대를 각인시킨 여성들의 삶을 담아내기에 더할 나위 없는 매체이다. 작가는 작가와의 개인적 친분과 상관없이 ‘동시대의 우정’을 나눈 친구들인 사진작가 박영숙, 작가 윤석남, 여성학자 김영옥, 시인 김혜순 그리고 정정엽 작가 자신의 최상화와 더불어, 목 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모습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신 심미자(1924-2008)의 초상화를 더해, 연약하고 소외된 존재들에 작가는 ‘그렇게 사라지는 삶에’ 마음을 쓴다. 심미자님 이외에도 뇌성마비 1급 장애인이자 엄마 그리고 장애인 인권운동의 선두에 선 인권운동가인 최옥란(1966-2002), 마포 ‘평화의 우리집’ 쉼터에서 18년간 일한 고 손영미 소장을 그렸다. 작가는 캔버스 화면에 이렇게 사라져간 여성의 삶과 흔적을 새겨낸다. 붓질 하나하나를 더하면서 작가는 이런 방식으로 그들의 삶, 상처 고통을 공감하고 있는 듯 하다.
전시장 한켠에 무언가 붓질이 이질적인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잘 그리는 것에 무심한 듯 슥~슥~슥~! 그려낸 초록의 풍경화와 당장이라도 이빨을 대고 물어 배고 싶은 옥수수 그리고 불그스름한 어둠이 깔린 길목풍경화 그려져 있다. 작가가 제주에서 4천평의 농사를 짓고 있는 최복인(1971- )을 만나 그린 그림이다. 야생의 풀밭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그 삶에 작가는 3점의 그림을 품앗이를 한다. 이와 같은 야생의 돌몸으로 드러나는 삶에 대한 에너지는 최복인님의 풀밭에서만 넘쳐나지 않는다. 2층 전시장으로 이어져 볼 수 있는 군상작품 속, 뽀글뽀글 파마머리에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몸빼 바지를 차려 입은 할머니 걸음걸이가 그러하다. 그들은 종종거리지만 넓은 보폭으로 머뭇거림 없이 다가온다. 그림 속 할머니들이 향하는 곳은 무서울 것도 두려운 것도 없다. 평생 밥을 짓고 나물을 다듬으며, 시대의 수난을 온몸으로 받아낸 그들의 얼굴 없는 할머니들의 인생은 이렇게 다음세대의 뒷심이 된다. 이렇게 나는 힘차게 동시대를 사는 터전을 활보한다.
2층으로 이어진 전시장에는 ‘정정엽 레드’가 선명한 인체 드로잉 연작이 펼쳐진다. 동료 작가인 홍현숙 작가의 퍼포먼스 장면을 담은 이 드로잉 연작은 속도감이 느껴지는 붓질, 물의 농도를 적절히 이용한 번짐 효과, 단순화한 인체표현과 같은 크로키 기법을 연상시킨다. 작가이자 관람객으로서 동료 작가의 전시에 대한 이보다 더 적극적인 감상법이 있을까?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회화작가가 작품의 시작과 끝을 결정짓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정엽 작가는 이렇게 작업의 핵심에 여성의 이야기, 동료의 이야기, 존재하지만 눈에 띄지 않는 이야기를 그린다. 정정엽 작가로 하여금 소외된, 지워진, 사라진 여성 심미자님 손영미 소장님, 최복인님, 몸빼바지 할머니 그리고 홍현숙 작가의 작업은 애정과 공감의 대상이 되고 주인공이 된다. 이런 점에서 정정엽작가는 화가이면서 동시에 활동가이자 테라피스트가 아닌가 한다. 뚜렷한 목소리로 기억되고, 치열하게 살다 사라진,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온 여성들을 그려온 정정엽 작가의 그림이 내게 기꺼이 비빌 언덕이 되어주는 것 처럼 말이다. [ ]
장윤주
정정엽 개인전 《걷는 달 Walking on the Moon》
기간 : 20201.8.26 - 10.31
장소 :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 이미지는 필자에게 제공받았으며, 사용 허가를 받고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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