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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유전자에 새겨진 뿌리의 냄새, <파친코>와 <미나리>가 지워진 이민의 역사를 되살리는 방식

by 동무비평 삼사 2022. 5. 29.

바야흐로 장벽이 낮아지고 경계가 녹아내리고 있다.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2020)는 93회 미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윤여정 배우)를 차지하며 화제를 모았다. <문라이트>, <미드소마> 등을 만든 플랜B가 제작한 <미나리>는 1980년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 아칸소주 농장으로 건너간 한인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한국계 미국 감독 정이삭(Lee Isaac Chun)의 자전적 사연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낯선 땅에서 뿌리를 내린 이민자들의 삶이 투영된 수작이다. 북미에서는 36회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수상한 이후 꾸준히 좋은 반응을 얻어 결국엔 아카데미의 영광을 거머쥐었지만 북미에서는 80퍼센트 이상 한국어를 사용하는 <미나리>가 외국영화인지 자국영화인지를 두고 작은 논쟁이 일었다. 제작, 배급 기준으로 한다면 <미나리>는 미국영화다. 언어를 기준으로 한다면 외국영화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혼란에 대해 정이삭 감독은 골든 글로브 수상 소감을 통해 우문현답을 내놓았다. “이 영화는 한 가족의 이야기다. 한 가족이 자신들의 언어로 말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는 영화다. 이 언어는 영어나 외국어보다도 깊다. 이 언어는 마음의 언어(a language of the heart)다.”

 

  <미나리>의 국적을 따지는 건 의미 없는 짓이다. 이 영화는 경계를 나누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이야기라기보다 차라리 미국의 역사와 기억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미국 땅에 뿌리내리고 터전을 일군 이들, 이민자들의 역사를 복원시킨 소중한 시도라고 해도 좋겠다. 북미에서 흑인과 유럽권 커뮤니티에 대한 다양한 소재에 비해 아직 동양계 커뮤니티에 대한 관찰과 이야기가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2018)처럼 장르영화의 흥행작이 나오긴 했지만 동양계 이주민들의 서사는 여전히 피상적인 대상으로 소비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런 와중에 <미나리>는 이민 세대가 직접 경험한 사연을 바탕으로 낯선 토양에 문화적 맥락이 어떻게 녹아드는지를 보편타당한 시선으로 전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보편타당한, 영화의 언어(혹은 진심의 언어)에 기반하면서도 고유한 정체성은 놓지 않는 태도에 있다. <미나리>는 한국영화도, 미국영화도 아닌 온전히 이민의 기억에 대한 영화다. 굳이 국적을 따지고 싶다면 <미나리>는 이렇게 설명되어야 한다. ‘1980년 미국으로 건너간 한국인 1세대’들의 영화‘라고. 

 

  <미나리>는 1980년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온 한국인 이민자 가족의 사연을 따라간다. 젊은 시절 제이콥(스티브 연)과 모니카(한예리)는 서로의 구원이 되어주자는 약속과 함께 미국으로 향했다. 영화가 섣불리 보여주지 못할 모진 풍파 속에서 두 사람은 딸과 아들을 낳고 낯선 땅에서 희망을 좇아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연고 하나 없는 이국에서의 생활이 순탄했을 리 만무하고 결국엔 변두리로 밀리고 밀려 아칸소의 어느 시골 마을까지 흘러들어 왔다. 영화는 그 지점부터 시작된다. 아칸소의 시골에 새 터전을 일구는 제이콥과 모니카 부부의 갈등, 할머니와 손자손녀의 소소한 시간들로 채워진 이 영화는 미국 이민자 가정이라면 누구나 겪어봤음직한 어려움을 섬세하게 그려 나간다. 정이삭 감독은 본인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짠 줄기를 짠 이야기에 주변인들의 세세한 디테일을 더해 이민자로서의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사실 <미나리>는 말해주는 것보다 말하지 못하는 것이 훨씬 많다. 이들 부부가 미국에서 와서 어떤 어려움을 겪어왔는지, 어떤 사연으로 아칸소까지 흘러들어 왔는지, 무엇 때문에 저토록 자신의 농장을 일궈내는 것에 집착하는지, 관객은 알 수 없다. 정이삭 감독은 “관객들은 너무 많이 말하고 보여주는 영화에 대해 쉽게 관심을 잃는다”며 일부러 사건을 비워놓는다. 

 

 대신 화면을 꽉 채우고 있는 건 낯선 땅에서 마주하는 숱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는, 서로를 부둥켜안은 가족의 초상이다. 한국에서 건너온 엄마가 딸의 굽은 등을 쓰다듬을 때 우리는 거기서 온기와 세월을 마주한다. 풀벌레 소리 가득한 밤, 자신을 밀어내는 손자가 그래도 못내 귀여워 꼭 껴안아주던 할머니의 심장소리에서 우리는 위안을 선물 받는다. 모든 것을 잃었던 밤 허름한 마루에서 온 가족이 서로 고난한 몸을 부비며 함께 자는 장면은 그걸로 이미 충분하다. 이 감정적 공유야말로 지워졌던 이민의 기억과 역사를 복원하는 비밀의 열쇠다. 심장병을 앓는 데이비드의 심장 고동소리로 출발한 영화는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구원이 되어주었던 어느 밤, 이야기를 닫는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할머니 냄새 나”라던 손자가 언젠가 할머니의 냄새를 그리워하리라는 사실을. 

 

  이건 그저 ‘한국적인 어떤 것’의 재현이 아니다. 보편타당한 사람들의 정서다. 이토록 익숙하고 단단한 서사에 문화적인 디테일을 통해 생기와 부피를 더하는 것이야말로 낯선 땅에 뿌리내린 <미나리>의 비결이자 힘이다. 이쯤 되면 이 영화의 국적을 따지는 건 부질없어 보인다. 미국 땅에 심은 미나리는 한국 미나리인가, 미국 미나리인가. 이름표를 붙이는 순간, 집단이 나뉘고, 구분되고, 배척되기 마련이다. 우리에겐 차라리 ‘미국 땅에서 자란 한국의 미나리’라는 정확한 설명이 필요하다. 여기에 ‘미국에서 이민을 온 한국인 가족’은 있어도 이방인은 없다. 현재 전세계에 흩어진 디아스포라의 기억은 그렇게 독자적인 이야기로 복원되는 중이다. 

 

 시대의 무의식은 동시다발적으로 조응한다. 최근 K콘텐츠를 중심으로 이민의 역사, 이방인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들이 연이어 등장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애플TV의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는 일제강점기 부산 영도부터 1989년 일본 오사카까지 4대에 걸친 재일 교포 가족의 일대기를 다룬다. 자이니치로서의 체험을 녹여낸 이민진 작가의 소설 <파친코>를 원작으로 한 이 드라마는 우리가 망각했던 자이니치들의 삶을 생생하게 되살린다.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영화는 지워진 역사와 기억을 복원하는 데 탁월한 역량을 발휘한다. 그런 이유로 지워진 자들의 외면받은 역사(혹은 기억)는 언제나 영화가 사랑해온 소재이기도 하다. 좋은 이야기는 호소하지 않는다. 작가의 분노를 ‘듣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재미있게 읽고 함께 분노‘하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평범함의 근간이다. 내용은 소설에서 상당히 각색되었지만 드라마 <파친코>도 이와 같은 정신을 고스란히 계승한다.

 

 선자(김민하)의 아버지는 하나뿐인 소중한 딸에게 말한다. “네 숨이 붙어 있는 동안에는 내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세상 더러운 것들이 널 건들지도 못하게 하겠다”고. 그리고 이건 결과로 실현되지 못한다.. 하지만 듬뿍 쏟아부은 사랑은, 대가 없는 무한의 애정은, 이 애달픈 의지는 세대를 건너 면면이 대물림 되어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로 자리 잡는다. 처한 상황과 현실의 벽, 형편에 따라 각자 다른 형태로 표현되지만 한결같은,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 누군가는 그걸 핏속에 흐르는 한 맺힌 피라고 하고, 어떨 땐 정체성 혹은 민족성이라고 쓴다. 이름표 따윈 상관없다. 그건 시대와 형태를 아무리 달리 해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덩어리다. <파친코>가 내내 부여잡고 관객을 향해 쏟아내는 것, 누군가의 기억과 역사를 뒤적인 끝에 가슴속에 앙금처럼 남는 것도 결국엔 이 뜨거운 덩어리들이다. 

 

  <파친코>는 고향의 냄새를 통해 유전자에 새겨진 어떤 것들을 되살린다. 한국 사람,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이 무엇인지 사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땅의 냄새만큼은 분명히 기억한다. 어머니 양진이 딸을 일본으로 떠나보내며 지어준 밥 냄새.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쌀 품종에서 나는 특유의 쌀 냄새가 아니라 어머니 마음의 살 냄새다. 때로 공간은 향으로 기억되고, 후각은 기억을 피워 올리는 강력한 촉매로 작동한다. 땅 냄새, 흙냄새, 바람 끝에 묻어나는 날씨의 냄새, 고추장과 된장에 인이 박힌 그리움의 냄새까지. 새로운 삶을 찾아서 먼 길을 떠나온 이들은 지긋지긋했던 그곳의 모든 기억까지 내려놓고 오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고 자란 고향의 냄새는 체취로 묻어나는 것이 아니라 가슴 밑바닥에서 스며 나오는 쪽에 가깝다. 어쩌면 한 번도 미나리의 향을 맡아보진 못한 아들, 그리고 손자에게까지 이어질 유전자에 새겨진 뿌리의 냄새. 면면히 이어진 그 냄새의 뿌리를 기억하는 한 세계, 어떤 땅에 새롭게 터를 잡고 살아가든 우리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 동시에 그 냄새를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그리움 이상의 관심과 노력, 시간에 대한 관찰이 필요하다. 새로운 땅에 새롭게 뿌리를 내리고 새 잎사귀를 틔운 시간, 고향을 떠나온 그 모든 이들이 견뎌낸 비바람의 시간을 바야흐로 영화, 드라마, 소설 등 다양한 이야기를 거쳐 되살아나는 중이다. 다시 기억하기. 아니 제대로 기억하기. 세계 각국에 흩어진(혹은 지워진) 이민의 역사는 그렇게 다시 돌아와 우리의 기억이 된다. [ ] 

 

송경원 (영화 평론가)



미나리

감독/각본 : 리 아이작 정(정이삭)

출연 : 스티븐 연, 한예리, 앨런 킴, 노엘 케이트 조, 윤여정, 윌 패튼 외 

제작사 : A24, 플랜B

연도 : 2021년 3월 3일(한국 개봉일)

 

파친코 

감독/각본 : 수 휴

출연 : 윤여정, 이민호, 김민하, 진하, 정은채, 노상현, 정웅인 외

제작사 : Media Res

연도 : [시즌1] 2022년 3월 25일 - 2022년 4월 29일

 

* 원고 중 일부는 필자의 '씨네21' 1280호 <미나리>기획기사 "미국 아칸소에서 미나리를 거두다"(2021.11.08)와

  1352호 프론트라인 "<파친코>가 달성해낸 특별한 평범함을 고심하다"(2022.04.18)에서 발췌, 인용하였습니다. 

* 이 글은 동무비평 삼사가 2022년 주제로 의뢰한 ‘디아스포라’ 관련 원고입니다. 

* 이미지는 필자에게 제공받았으며, 사용 허가를 받고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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