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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유희적 전술로서 응시 혹은 탈선하기

by 동무비평 삼사 2022. 5. 29.

 

바닥을 침투하는 축축하고 끈적이는 타액의 흐름을 따라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는 신체 조직들

반사된 빛의 각도를 따라 접혔다 펼쳐지는 표면 너머로 조각되는 장면들

그 이면에 뚫린 검은 구멍과 그 속에 숨겨진 유물들 너머로 대기의 습윤한 질감을 따라 몸을 형성하는 환영들 

 

가변적이며 유기체를 동반하고 공간에 달라붙어 하나의 완결된 형태로 조망할 수 없는 작품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전시를 감상하기 위해선 장소와 인프라, 작품과 신체의 접촉을 통한 뒤얽힘과 화학작용으로 융해해 들어가는 연금술적인 눈이 필요하다. 감상은 응접실을 향하는 길목에서부터 시작한다. 전시는 응접실이라는 공간 자체를 전유하며, 응접실은 인천이라는 지형학적 플랫폼을 경유하여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인천역에서 20여분 정도의 보도 이동 후에- 능인사와 하이델베르그 호프, 큰손천사와 여타의 모텔이 즐비해 있는 골목을 통과해’[각주:1] 마침내 도달한 ‘응접실’에서의 관람은 ‘걷기와 이동’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관객은 유랑하듯 골목길과 언덕을 통과하여 인천이라는 지리적 시공간을 몸으로 접촉한다. 그리고 그 경험은 작품을 감상하는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전시장 바깥으로 확장된다.

 

 그렇다면 응접실은 어떤 전시공간일까. 응접실은 단일한 전시장의 형태로 쉽게 정의되지 않는다. 이곳은 ‘관객의 수용성을 감각하고 시험하는 공간’[각주:2]으로서, 작가의 10년간의 아카이브를 1인 관람 형태로 자유롭게 선택해 보거나(갈유라 작가 팝업전《그래서 우리는 선회하기로 했다》(2022)), 야외에 앉아 전시장 내부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스트리밍 영상으로 관람하거나(박유라《응접실》(2021)), 사운드 퍼포먼스를 감상한 뒤에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방식의 프로젝트성 전시 혹은 퍼포먼스(권희수《코어 인터루드》(2021))를 기획해왔다. 이는 응접실의 전시가 특정 매체로 규정되기보다 일종의 포맷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낮에는 12시부터 3시까지 통유리의 전면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통해 은접시와 물줄기가 빛에 반사되는 동시에 저녁에도 전시를 오픈해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의 눈에 결국 띄게끔 하는’[각주:3] 전시구성은 응접실의 전시가 고정된 작품의 완결적 형태의 전시장이 아닌 지역 주민과 인근의 장소, 과거의 역사를 접속하고 연결하는 매개자이자 공유지로 공존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시로 조금 더 들어가 보자면 《민관의 은: 접시》는 응접실과 발음이 유사한 단어, 은접시와 응접실 공간 운영자인 김민관의 활동으로부터 모티프를 얻어 기획된 프로젝트로 정재희, 조경재, 황민규 세 작가의 콜릭티브의 전시다. 언어유희를 동반하는 본 전시는 응접실과 공간 운영자 김민관에 대한 유희적 전유로서 아무것도 아닌 운동성 그 자체를 지향한다. 아무것도 아닌 흐름으로 운동을 지속하기. 운동은 수렴과 확장, 이탈과 응시를 반복한다. 기획 과정에서도 알 수 있듯 한 작가의 독립된 작품으로 수렴하지 않는 본 전시는 단일한 작품으로 공간에 귀속되기를 거부한 채 장소와 분리되지도 부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은접시와 응접실, 응접실과 인천 사이를 ‘뫼비우스의 띠’처럼 순환한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중심을 끊임없이 비껴 나감으로서 궁극적으로 어느 장소에도 도달하지 않는다. 

 

 

 관객은 전시장 내부에서 두 다리 형상을 연상케 하는 시멘트를 덧붙여 만든 조형물과 그 한가운데 은접시를 타고 흐르는 두 갈래의 물줄기를 가장 먼저 목격하게 된다. 조형물은 벽과 바닥에 달라붙은 응고된 점액질처럼 공간에 밀착되어 화장실 수도관의 물줄기를 실어나르는 통로로서 물의 흐름을 재배치한다. 또한 어느 각도에서도 작품 전체를 조망할 수 없는 탓에 본 전시는 필연적으로 신체적 개입을 요청한다. 마치 거대한 신체에 침투한 불순한 바이러스처럼 관객을 작품의 일부로 포섭하는 것이다. 전시장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물줄기를 따라 걷거나, 물소리를 들으며 바깥 풍경을 관조하는 관객들은 전시가 구축한 ‘땅굴 복합체에 참여하여 내부적으로 자신의 기본 단위들을 재배치하고 더욱 다재다능한 노선으로 탈바꿈한다.’[각주:4] 그리하여 관객은 작품과 장소를 재배치하는 매개자로서 응접실, 나아가 인천이라는 특정 장소와 작품 포맷의 일부로 거듭난다.

 

 통유리로 이루어진 응접실의 3면 유리창과 허공의 중심에 자리한 은접시는 관객의 침투와 이탈에 중심점을 형성한다. 정오의 태양빛을 그대로 반사하는 은접시가 시선을 모으는 외눈으로서 하나로 모아진 이미지를 바깥의 잠재된 미래를 향해 분출한다면, 관객들의 시선은 은접시가 방사하는 빛의 방향을 따라 마치 영화를 감상하듯 통유리 너머의 풍경으로 자연스럽게 향하게 된다. 관객이 이곳에 머물며 바깥 해질녘 풍경에 시선을 담그고 하교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로 수렴하는 동시에 방사형으로 펼쳐지는 운동성, 응접실이라는 공간적 특이성이 효과적으로 발화하는 지점은 원심력과 구심력이 함께 작동하는 공간적 특성에 기인한다. 지나가던 익명의 동네 주민들을 공간 안으로 끌어당기고 응접실 내부에서 작품을 관람하는 관객들의 시선을 통유리 너머 바깥으로 펼치게 하는 이중접촉의 경계에 응접실이 위치한다. 관객과 비관객, 작품과 쓸모를 알 수 없는 그 무엇의 경계는 이러한 접촉지대에서 요동친다.  

 

 그 틈새를 비집고 경로를 교란하는 것은 흐르는 물줄기다. 팽창과 수축, 횡적으로 팽팽하게 균형을 유지하는 유리창과 은접시의 이중 구도를 분산시키는 물의 흐름은 상처를 새기듯 수직의 운동성을 뒤얽히게 한다. 본래 은폐된 공간인 화장실의 수도를 연결해 공간 바깥으로 뻗어나가게 만든 물줄기는 구조적이고 수직적이며 명료한 공간적 구조에 균열을 일으키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시선의 운동성을 가시화한다. 응접실을 오는 관객들이 길 위에서 물줄기를 마주했으면 좋겠다는 작가 조경재의 언급대로 어디로 흐를지 알 수 없는 미지의 물줄기는 모종의 ‘이미지 산책로(image promenade)’를 생산하며 관객들의 시선을 바깥으로 이끈다.

 

 가시화된 것과 은폐된 것의 중첩 구도는 은접시와 설치물 안쪽에 숨겨진 김민관의 사적인 컬렉션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작가는 설치물 아래 안쪽 구멍에 김민관의 ‘민관 컬렉션’과 사진을 모아 두었는데, 각종 피규어, 장난감, 플라스틱 장식품들로 이루어진 이 컬렉션은 흡사 제의적 재단을 떠올리게 한다. 은접시가 이 전시의 구심점이자 맹점으로서 하나로 모아진 이미지를 무에서 바깥으로 잠재된 미래의 이미지들을 방사한다면, 숨겨진 ‘민관의 사적인 컬렉션’은 중세 분더캄머(Wunderkammer)를 연상시키며 미적 판단과 비평의 기준으로 분열된 전시장 이전에 온갖 잡다하고 이질적인 수집품들로 채워져 있던 소우주로서 예술의 통일된 차원, 그리고 수집품 이전에 종교적이고 제의적인 차원의 감흥을 느끼던 시간으로 소급해 올라가는 예술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손쉽게 눈에 띄지 않는 이 컬렉션은 무엇인가 보여주기 위한 전시의 목적을 배반한다. 보이는 것과 드러나지 않은 것,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이에 공존하는 컬렉션은 이 전시의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눈으로서 구심점을 형성한다. 숨겨진 상태로서 존재를 가시화하는 역설적 상태가 드러내는 것은 바라보지 못하는 주체다. 보지 못하는 관객의 시선은 가시화된 것 이면에 은폐된 기억과 이미지를 향한 질문을 추동시킨다.

 

 

 그 질문의 끝에서 다시금 떠올리게 되는 것은 상실된 ‘무엇’, 말할 수 없는 유아기의 역사다. 어린 시절 놀이터에서 모래로 만들던 굴 파기를 연상시키는 조형물(혹은 통로)과 성스러운 제단의 비약으로 도약하는 움직임은 유희적 발산 이외의 아무 목적도 생성하지 않는다. 의미와 목적을 이탈하는 놀이, 그리고 그 운동성을 통해 발굴되는 근대의 지층 아래에 잠들어 있는 예술의 유실된 기억들. 소수에게만 공유되던 분더캄머는 하나의 소우주에서 떨어져 나와 분열과 통합의 왕복 운동 속에서 스스로를 간신히 지탱한다. 희귀하고 진귀한 소장품들의 은밀하게 반짝이는 가치는 플라스틱 장난감과 장식품으로 교체되었고 제의성을 띤 상징적 오브제의 무게는 유희적 가벼움으로 대체되었다. 이곳에는 ‘민관응접실’과 ‘민관은접시’ 사이에서 격렬한 진자운동을 하는 공백 그리고 두 개의 문을 향해 뻗어나가는 열린 상태만이 존재할 뿐이다. 아무것도 아닌 공백의 진자운동, 그리고 그것을 다시금 와해시키는 바이러스들, 타액의 시선들. 분열과 과잉의 혼란 속에서 유희로 둔갑한 역사의 기원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이 어디까지나 농담이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역사. 이것은 작품이 아니며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며 전시가 아니며 미술관이 아니다. 아감벤의 언급대로 ‘이제 스스로에게서 고유의 목적과 토대를 발견하는 자유를 획득한 예술’이 영혼을 황홀경에 빠져들도록 하는 신성한 것의 구체적인 현현이나 신성한 공포가 아니라 비평적 취향을 발동시키기 위한 ‘특별한 기회[각주:5]에 지나지 않는 역사’를 형성해 온 이래 하나의 의미와 매체 단일한 전시를 비껴나가는 ‘아니’의 운동성은 《민관의 은: 접시》가 점유하는 응접실로, 응접실에서 예술의 분과된 형상을 향한 유희로,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무의 상태로 운동을 지속하며 잠재된 차원의 미래로 의미를 유보한다.

 

 응접실은 밤이면 길고양이들의 집합소로, 예술의 미래와 과거의 미용실이었던 잔재된 기억을 소환하는 기이한 장소로, 비평적 관객과 동네 주민들, 중심과 주변이 동시에 점유되고 중첩되는 ‘역설적 공간(Paradoxical space)’으로 수수께끼적인 행보를 걷고 있다. 이제 이곳은 유리창과 은접시, 사적인 컬렉션과 공적인 전시를 교차하는 종횡의 접점에서 부정의 운동성과 모순된 이중 구도의 역설을 추동력 삼아 아무것도 아닌 공백의 주변부로 확장을 꾀한다. ‘지역에 대한 것들을 읽고 존재를 마주하고 그 바깥으로 향하는 운동성’을 통해 ‘이것이 내 삶의 지속적인 의식이 되고 미래의 죽음이 되고 현재의 공백이 되는 예술’[각주:6]의 궤적을 보여주는 물줄기의 경로는 어디를 향하게 될까. 은접시가 응접실을 비추는 일별의 시간, 방사된 빛의 손길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뚫고 무엇을 발굴하게 될지 고고학자의 미래는 여전히 미지의 운동상태로 남아 있다. [  ]

 

 

권희수 (작가)

 

 

민관의 은: 접시 Minkwan’s Silver: Plate

기간 : 2022년 3월 13일 일요일 - 3월 27일 일요일 

장소 : 응접실 

참여 : 정재희, 조경재, 황민규

사진 : 김민관 

참고 : 인천문화재단 점점점 특화사업 

 

*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했으며, 사용 허가를 받고 게재합니다. 

 

 

  1. “박유라 <응접실>”, 응접실 인스타그램, 2021년 9월 23일, https://www.instagram.com/p/CUKLFjfJTIm/?igshid=YmMyMTA2M2Y= [본문으로]
  2. 응접실 인스타그램 소개글, https://instagram.com/eungjeopsil?igshid=YmMyMTA2M2Y= [본문으로]
  3. “정재희, 조경재, 황민규, 《민관의 은: 접시》 전시 전경+리뷰”, 응접실 블로그, 2022년 4월 1일, https://eungjeop-sil.blogspot.com/?m=1 [본문으로]
  4. 레자 네가레스타니, 윤원화 역, 『사이클로노피디아』, 미디어버스, 2021, 88쪽 [본문으로]
  5.  조르조 아감벤, 윤병언 역, 『내용 없는 인간』 (ebook), 자음과모음, 2001 [본문으로]
  6. “지역 예술의 이념”, 아트신 웹사이트, 2021년 12월 31일, https://www.artscene.co.kr/180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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