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를 대상으로 하는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에 더하여 전시 기획자를 대상으로 하는 큐레이토리얼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이 양적, 질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은 서울뿐 아니라 광주, 부산, 인천 등 국내의 다양한 지역에서 팬데믹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개최되고 있으며 참여 기간과 결과물은 프로그램의 성격에 따라 다양하다. 프로그램은 크게 두 가지 구성을 가진다. 하나는 정해진 기간 동안 입주하여 해당 지역에 머무는 레지던시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약 5회에서 10회 정도 주기적인 모임을 가지는 워크숍 형태이다. 후자는 전자를 간소화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참여 기획자 개개인의 전문적, 직업적 역량 강화를 1차 목표로 두지만, 특정 지역을 거점으로 삼는 큐레이토리얼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의 경우 한 가지 의제가 더해진다. 해당 지역과 로컬리티로의 입문이다. 둘 중 어느 쪽의 형태를 채택하든 국내외 전문가 초청 강연, 세미나, 개인 및 공동 리서치, 토론과 동료 비평 등 기획 역량 강화를 위한 구체적인 활동들이 준비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프로그램이 서울 밖의 특정 지역에서 진행된다면 해당 지역과 로컬리티라는 주제가 대폭 강조된다. 참여 기획자 또한 로컬리티를 의식하며 리서치 과정에 임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때 기획자는 해당 지역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현안을 공동의 고민으로 변환하는 역할이나 소위 ‘지방색’이라고 통칭되기도 하는 문화적 영역을 탐구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그러나 한정적인 자원 내에서 이러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면 이때의 로컬리티는 낡고 피상적인 의미에 그칠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도 사실이다.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주관한 전시 기획자 교육 프로그램 <큐레이터 스쿨 2021>은 작년 4월부터 올해 4월까지 약 1년간 (비)정기적인 모임을 가지는 워크숍 형태로 진행되었다. 참여자들은 현재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과 기획으로 예술계에 진입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프로그램 초반은 긴 호흡의 강연들과 현장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선배 기획자들의 릴레이 강연이 진행되었고, 이후 참여 기획자들이 직접 프로그램의 방향을 설정하고 구체적인 내용과 활동을 직접 조직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2021년 11월부터는 본격적인 결과보고 기획전 프로덕션에 착수하였다.
프로그램의 전반적인 초점은 인천 지역의 지역성보다는 기획자로서의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역량 강화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전시 주제 수립 과정에서 기획팀에게 인천 지역의 로컬리티에 관한 대화가 계속해서 물 위로 올라왔으나 최종적으로는 전시의 주변 주제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러한 판단에는 여러 요인이 영향을 주었다. 먼저 결과보고 기획전은 공동 기획으로 마련되어야 했고, 참여 기획자 개인들이 탐구하고 있는 주제는 아주 느슨한 선에서만 공통 지반을 가졌다. 참여 기획자들 사이에 인천 지역과 로컬리티에 집중한 대화가 사전에 충분히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각자의 주제들과 인천의 로컬리티를 엮어 새로운 맥락과 실질적으로 의미 있는 독자적 메시지를 전시로 만들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무엇보다 단순히 인천 지역 출신의 작가들만을 모아 만든 전시, 인천을 작업의 주제로 놓는 작품들을 모아 만든 전시가 진정으로 로컬리티에 관여하는 바가 무엇일지 의문스럽다는 결론으로 뜻이 모아졌다.
결과보고 기획전 《날것》은 4명의 최종 참여자들이 공동으로 기획하였다. 공동으로 기획하였기에 이하의 내용은 이번 전시를 만들며 정리한 개인적인 생각임을 미리 밝힌다. 전시가 문제 삼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연애, 결혼, 섹슈얼리티를 포괄하는 사랑의 전형(典型)을 둘러싼 것들이다. 이러한 주제 선정에는 동시다발적으로 발생 중인 우리 사회의 시대적 풍경들이 영향을 주었다. <나는 솔로>, <솔로지옥>, <우리 이혼했어요> 등 이성애중심주의를 다시 부각하고 가부장제에 기초한 ‘정상 가정’ 문화 소생에 대단히 애를 쓰는 중인 최근의 예능 프로그램들,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고 서울퀴어퍼레이드 개최에 관련해 벌어지는 일련의 시위들, 그리고 섹스도,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4B 선언 등이 이 풍경을 이룬다.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가부장적 가치와 제도들이 반드시 수호해야 하는 대상이 된 지금이야말로 오히려 변혁이 일어나기에 적절한 시기라는 진단이 기획의 배경이 되어 주었다.
전시의 형식적 측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논의들이 있었다. 기획팀 4인은 이 전시가 단순히 여성 작가들의 생물학적 성별에만 기초한 성긴 엮음이나 여성/주의를 선언하는 전시, 여성이 피해자임을 폭로하는 전시가 되는 것만큼은 지양하자고 합의하였다. 그 대신 작지만 단단한 이야기를 만들고자 했고, 따라서 우리가 비남성적 주체들의 정체성에서 핵심이라고 보았던 성질들, 예컨대 양가성, 파편성, 일시성 등을 작업의 내용과 형식 차원에서 적절히 구현했다고 생각되는 작업들을 전시하고자 했다. 전시장의 복층 구조를 따라 전시를 1부와 2부로 나누었고, 1부는 이성애중심주의 내에서 여성이 놓인 현실과 상황, 그리고 그 안에서 여성의 상태를 조금 더 직접적으로 호명하고 지시하는 작업들을 놓았다. 1층과 이어진 전시장 중앙 부분의 가장자리에 복도식으로 지어진 2층에서는 1부에서 살핀 현실을 토대로 하여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고자 했다. 이로부터 우리의 정체성이 일관성으로부터 지연되거나 유예되는 과정을 제시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기존의 정체성 모델을 재고하는 계기를 형성하고자 했다. 이 재고에서 사랑은 매우 중요한 자기 정체성 정립의 장인데, 이 이야기는 전시 종료 후 발행될 도록에서 풀어갈 예정이다.
실효성 있는 강연과 공동의 주제를 찾아 전시를 만들어가는 과정도 물론 유의미했지만, 더 의미 있는 것은 (개인에 따른 편차가 있겠으나) 참여 기획자들이 프로그램을 계기로 인천이라는 지역에 자주 방문하며 그곳의 지역성을 익히고 재편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로컬리티에 관여하는 많은 실천들이 여전히 공동체의 결속과 지역의 역사성을 기반으로 지역의 ‘색’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한편 그곳에 이방인, 관광객, 초심자로 초대 받은 방문객들, 즉 기획자들은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세계와 알지 못했던 세계를 맞대고 결합하고 때로는 잘라 내며 자기만의 인천(이나 그 외의 다른 지역) 지도를 형성해 간다. 혹은 미래의 어떤 시점에 발동할 가능성을 내포하는 무늬나 테를 자기 자신 안에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민간과 공공 다를 것 없이 운영 기반의 상당 부분을 공공기금에 의존하고 있는 국내 미술계에서는 대단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인 것도 사실이다. 프로그램 종료와 함께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내놓아야 하고, 이는 다시 기존의 협소하고 순진한 의미에서의 로컬리티와 공동체에 기여하는 (악)순환을 일궈내야 한다. 이때의 순환이란 사실상 경제적인 회전일 뿐 미래와 미래의 예술을 위한 순환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 더 나은 방법을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다. 프로그램을 이끌어 나가는 기획자나 에듀케이터, 예술행정가의 역할 또한 프로그램의 향방을 결정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단순히 지역의 명물을 소개하고 지역 주민과 참여자 사이의 불협화음을 어떻게든 화음처럼 보이도록 봉합하려는 시도나 지난한 행정적 절차로 숨통을 조이기보다는 참여 기획자가 스스로 지역의 지리적, 문화적 경계를 재구성할 수 있는 창의적 환경 조성에 힘써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참여 기획자는 단순 참여자, 기금 수혜자, 교육생 신분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지역 개입자이자 로컬리티의 순환 고리를 생성하는 하나의 노트로 작동할 것이다. 큐레이토리얼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 ]
김얼터 (전시기획자)
날것 The Raw
작가 : 강나영, 김실비, 김옥선, 김화현, 류한솔, 무니페리, 박선호, 박혜인
이순종, 이은실, 장파, 정두리, 정해나, 한지형, Dadboyclub
기간 : 2022년 5월 3일 - 5월 29일 일요일
장소 : 인천아트플랫폼 B동
기획 : 김가현, 김얼터, 손의현, 전현지
협력 : 디아스포라영화제
참고 : IAP 큐레이터 스쿨 결과 보고 기획 전시
* 이미지 출처는 인천아트플랫폼 홈페이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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