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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고려미술관, 설립자 정조문

by 동무비평 삼사 2022. 5. 29.

고려미술관 입구

재일조선인, 자이니치(ざいにち [在日], 일본에 살고 있는 한국인 또는 조선인을 지칭하는 말로, 자이니치의 국적은 일본의 외국인등록법에 따라 한국 또는 조선으로 표기된다.)는 최근 각광받는 드라마의 소재로 등장해 역사의 응어리로 그 존재를 드러냈다. 이들이 전후 일본 파친코 사업을 통해 일본 일대에서 자본을 형성했다는 사실은 공공연히 알려진 이야기이다. 재일조선인이란 존재가 연상시키는 역사적, 민족적 이질감과 더불어 '파친코' 라는 도박, 즉 사행산업의 자본주의 퇴폐성이 겹쳐져 묘한 이미지가 뒤섞인 채 연상되기도 한다. 조선후기, 일제강점기 그리고 한국전쟁까지, 소위 한국의 압축된 근대화라 치부된 이 역사의 상흔들은 미처 풀지 못한 실타래처럼 머물러 있다. 한국 근대사의 다양한 디아스포라(Diaspora) 현장 중, 재일조선인의 디아스포라는 상대적 근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과 현재는 아직도 과거에, 역사에 머무른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

 

 재일조선인이란 한국과 일본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전후 혼란시기를 오롯이 겪어낸 이들 중 재일조선인 정조문(鄭詔文, 1918∼1989)을 발자취를 소개하고자 한다. 정조문은 일본 교토(Kyoto)에 위치한 고려미술관 설립자로 흔히, 일본의 간송 이라고 칭해진다. 간송 전형필 선생이 사재를 털어 국운이 다한 나라를 대신해 반출된 위험에 놓인 수많은 조선 미술과 공예품을 지켜낸 위인으로 알려져 있듯이 정조문 역시 그에 빗대어 업적을 연상할 수 있겠다. 두 위인 모두 누구 하나 쉽지 않은 행보를 걸어왔지만 여기서 정조문의 자취는 재일교포 1세대였던 그의 정체성을 상기해 볼 때, 한 민족, 국가의 역량 이상의 행보를 보인다. 

 

 1918년 일제강점기 경북 예천군에서 태어난 정조문은 6살 때 부모님과 일본으로 건너가, 파친코 사업으로 재력을 다진 후 1955년 우연히 접한 조선백자에 관심을 두고 우리의 문화재 1700여점을 수집하기에 이른다. 그의 수집품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친 도자기와 불교조각, 회화, 금속공예품 등의 유물을 포함하고 있는데, 무릇 국내 여느 박물관과 비교해도 그 수집품이 뒤쳐지지 않는다. 그의 우리미술품에 대한 열정은 사실 그를 뒷받침 할 만큼의 안정된 파친코 사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일본 파친코 산업은 전후 쓸모가 다해진 군수용품 중 하나인 베어링(금속구슬)의 소진과 혼란한 시기의 오락거리의 등장이 맞닿으면서 그 수요가 급증했는데, 당시 공공기관이나 민간기업의 진출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일본 내 한인들은 사행성 산업으로 기피되었던 파친코 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일본 내 파친코 산업의 약 70%를 재일조선인들이 운영하기도 했는데, 파칭코로 자수성가한 대표적인 이는 일본 30대 기업 마루한의 총수 한창우(1931~ )가 있다.

 

 폭력배의 간섭과 경찰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일군 파친코 사업이 안정될 무렵 정조문은 우연히 접한 백자 항아리가 그를 조선의 공예품으로 이끌게 된다. 정조문의 업적은 단순히 일본으로 유출된 문화재를 수집한 것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이렇게 30년간 수집된 공예품 1700여점들로 1988년 재단법인을 설립과 더불어 교토에 지하 1층, 지상 3층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의 고려미술관이 세워졌다. 그가 타계하기 네 달 전의 일이다. 고려미술관은 한국 문화재로만 소장된 유일한 해외 소재 미술관이자 이후 일본 한국학 연구의 거점으로 역할하게 된다. 고려미술관이 세워진 교토는 1868년 메이지유신 전까지 일본의 수도였거니와 한자로는 경도(京都)로 본래 수도를 의미하는 일반명사일 만큼, 일본의 역사를 대표하는 소위 보수적인 지역임에 분명하다. 여기서 우리는 재일조선인 정조문 문화재 수집 뿐 아니라, 고려미술관이라는 상징과 그 실체가 세워지기까지의 과정이야말로 정조문이란 사람의 업적과 가치를 다시금 상기시킨다.

 

 정조문의 수집에 대한 열정은 한때 고려미술관 관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교토대학교 명예교수이자 사학자인 우에다 마사야끼(上田 正昭, 1927-2016) 의 언급을 빌어 왕왕 소개되기도 하는데, 그만큼 정조문과 뜻을 함께하고 활동에 동참한 이다.  우에다 마사야끼는 정조문과의 교류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일본의 고대사 연구와 일본 내 차별 철폐를 주장하며 인권연구소에 몸담기도 했다. 이외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80년 신군부에 의한 사형선고에 맞서 구명운동에 나서기도 한 역사 소설가 시바 료타로(福田定一, 1923-1996) 역시 일본 지식인으로서 정조문의 취지와 활동에 뜻을 함께했다. 이는 재일조선인이라는 위치에도 불구 교토의 진보, 우익 지식인들과의 섬세하고도 정치적 감각의 관계 맺기로 가능했을 것이다. 

 

고려미술관 야외 뜰 

 정조문의 조선 미술품에 대한 관심은 수집뿐만 아니라, 일본 내 조선 문화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 있었다. 정조문의 한국 문화재에 대한 열정은 단순히 가치 있는 문화재를 소장하기 위한 목적보다 일본인에게 빼앗긴 것을 되찾겠다는 집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정조문은 1969년 형 귀문과 '조선문화사'를 설립하고 계간지 <일본 속의 조선 문화>를 창간했다. 이 간행물은 일본에 전파된 조선 문화의 궤적을 찾는 일련의 자취들을 학술연구 및 답사를 이끌어 냈는데, 여기에 동참한 이로는 일본과 조선의 고고미술사학자 등 문화·지식인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식민-피식민의 관계를 넘어서, 한일 역사는 물론 조선 고대 불교학, 민속학, 풍속학, 고대언어 등 1981년 휴간에 들어가기까지 의미 있는 연구성과물을 발표했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함께 공유한 문화적 가치로 다가간 일종의 민간외교의 한 실제이기도 하다. 더욱이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차별과 편견이 걷어지지 않은 시기에 정조문의 활동에 힘을 실어준 일본 지식인들의 학자로서의 양심적 행보는 현실의 시비를 넘어선다. 

 

 정조문의 이야기는 <정조문의 항아리>(2015, 감독 황철민)란 제목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그의 생전 모습과 고려미술관에 소장된 값진 문화재의 이미지, 더불어 그의 유지를 이어 고려미술관을 어럽게 운영하고 있는 아들 정희두(고려미술관 상무이사)씨가 등장한다. 그는 영화속에서 정조문이 생전 고향을 그리며 바라보던 언덕을 찾아, 아버지를 향해 "아버지 우리를 도와주세요"라고 울부짖는다. 정조문이 세운 고려미술관은 국가도 하지 못한 일을 일개 개인이 이뤄낸 성과인 만큼, 고려미술관의 유물에 대한 관리와 연구가 꾸준히 이어지려면 재정적인 도움과 관심이 필요하다. 

 

 정조문의 업적은 한국과 일본의 문화 교류와 역사적 근원은 향후 한일 관계가 모색해야 할 지향점이자 비뚤어진 한일 관계사를 풀어낼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생전 정조문은 남과 북으로 나뉜 고국 중 한 곳을 선택하는 대신 조선적(朝鮮籍)이라는 국적을 버리지 않았다. 한국도 일본도 아닌 평생을 임시국적을 유지한 그의 삶은 한국과 일본 사이, 근대와 현대, 역사와 현재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채 경계인, 즉 디아스포라 자체의 삶을 살았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할 수 없었던 일은, 그가 경계인이었기에 가능했다. 정조문은 고려미술관의 소장품들이 일본과 조선의 문화적 우위를 논쟁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조국의 역사와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진정한 국제인을 위한 발자취이길 바랬다. 조선, 한국의 성숙한 아름다움은 일본에서도 언어, 사상, 이념을 초월할 것이니 이 흥취를 느끼라고 말이다. 이렇게 미처 풀어내지 못한 타래의 끝은 한 개인의 집념과 노력이 빚어낸 거대한 유산으로 점철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고됐을 디아스포라의 삶을 대신 살아낸 그들에게 진 빚을 올곧게 갚아나갈 수 있는 공감과 연대의 감각을 깨치는 일이 아닐까 한다. [

 

유주 (전시기획)

 

고려미술관  www.koryomuseum.or.jp

 

* 이 글은 동무비평 삼사가 2022년 주제로 의뢰한 ‘디아스포라’ 관련 원고입니다. 

* 이미지는 필자에게 제공받았으며, 사용 허가를 받고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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