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종의 배제와 억압, 폭력에 의해 타자가 발생하는 지점에서 ‘발화’는 그 직전 혹은 과정에서까지 주체 설정에 대한 혼란을 수반한다. 여기에는 그 현실에서 나는 무엇으로 명명되고 규정될 수 있으며, 그것을 직접 감각했는가와 같은 복합적이고 엄격한 물음이 요청된다. 남성/여성, 가해자/방관자/피해자, 소수자/주류 등 다양한 정체성을 겹쳐 고민하면서 궁극적인 발화 주체를 구성했을 때, 다시 그 주체는 이것을 말하기에 완전무결한 화자인가를 성찰하고 마침내 선택해야 한다. 말할 것인가/ 말하지 않을 것인가.
결국 ‘말하기’는 몸을 가진 자의 의지와 결심으로 성립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 ‘말할 것인가’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기준, 화자 스스로 나아가 사회적으로 합의된 것처럼 작동하는 감각은 ‘말할 수 있는가’에 가깝다. 이 물음의 진원은 말하는 주체의 당사자성에 있는데, 말하는 몸과 ‘말’이 일치하는 하나의 주체인가의 여부가 정당성의 문제로 귀결된다. 완전한 당사자라는 확신이 어려운 부분적 당사자, 목격자, 관찰자… 다시 말해 어떤 주체에서 떨어진 타자의 경우 제3자로서 말할 자격, 아도르노가 전언한 재현불가능성의 문제에 직면한다. 비당사자의 말하기에는 ‘재현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타자의 고통 앞에서 그가 아닌 당신이 ‘말할 수 있는가’라는 주체의 적격여부가 필요조건처럼 따라붙는 것이다.
2022 아르코미술관 기획초대전 《올 어바웃 러브: 곽영준&장세진(사라 반 데어 헤이드)》는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 의해 훼손된 삶과 그 시간을 훑고 지나온 세계의 모습을 조형언어로 말한다. 장세진과 곽영준은 편의와 이익을 위해 한 개인, 한 가족, 한 공동체를 간단하게 처분하고 개체성마저 묵살하는 현실의 단면을 직시한다. 그들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아이를 해외로 입양시켜야 했던 두 어머니의 이야기”(<어머니 산신 기관> 2017-), “태어나자마자 이별해 만나지 못한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브뤼셀> 2016),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정체성을 받아들여야 했던 트라우마”(<천천히 불사르기>, <아, 마치 그렇게!>) 1까지 분리되고 소외되었던 자신의 서사를 기록하고 발화함으로써 개인적, 사회적 상처를 들추어 새롭게 주목하기를 요청하고 공존과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직업인으로서 창작자는 각기 다른 매체를 통해 계속해서 새로운 주체를 만들어 발화한다. 이때 주체는 창작자와 반드시 동일한 하나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하고 움직이는 다중적 주체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모든 창작자는 ‘비당사자적 말하기’를 수행한다. 전시 연계 라운드테이블 <트래버스: 젠더, 디아스포라, 기억>에서 문학평론가 오혜진, 소설가 조해진, 영화감독 김일란은 전시의 관람자 혹은 관찰자이자 미술 바깥의 창작자로 이번 전시에 대해 재고하고, 장세진과 곽영준의 ‘말’을 이어간다.
김일란은 세월호 참사 당시, 촛불집회 취재 영상을 제작하면서 “당신들의 슬픔으로 한 걸음 걸어가겠습니다.”라는 자막을 넣었다고 한다. 이후 “세월호 참사의 슬픔은 '당신'이 아닌 '우리'의 슬픔"이며, 이는 타인에 대한 선긋기와 대상화라는 문제 제기를 받으면서 당사자의 위치에 대해 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신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나의 위치와 그 거리를 좁혀나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작업과정과 결국 당사자성이라는 것에 대한 고민이 따라붙는 작업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비평, 소설, 영화라는 말의 형태를 떠나 비당사자의 말하기는 말해지는 대상의 고통을 해석하고, 편집하고, 전시한다는 점에서 재생산의 혐의를 갖는다. 그러나 동시에 무언가를 언어로서, 이미지로서 재현하는 일은 존재를 증명하고 사태를 증언함으로써 타자를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그들과 연대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오혜진은 서사의 주체가 저자여야만 한다는 강박적 ‘당사자주의’에 대해 비판한 적 있다. 그는 특히 퀴어/페미니즘 문학장에서 저자의 정체성에 따라 서사의 ‘순도’가 결정되는 현상을 조명하며, 개별자로서의 권리를 확보함으로써 수립되는 ‘주체’의 신화를 심문하기를 제안한다. 2더불어 이러한 당사자주의는 민주주의에 대한 공동체 책임을 소수자에게 전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당사자/비당사자로 구분되는 말하는 주체와 말해지는 타자는 공통의 시공간에서 삶을 살아내는 주체로서 동시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 구성원 모두는 당사자성을 나누어 갖는다. 사회 면면의 폭력으로부터 이를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감각한 명백한 당사자만이 아니라, 각기 다른 경험을 통해 그 폭력에 대한 인식과 해야할 것/멈춰야할 것에 대한 공통의 지식을 축적한다는 점에서 책임을 함께하는 것이다.
말하기 즉 증언은 매순간 주체가 내리는 결정으로, 일종의 선언이며 그로부터 과거에 없던 미래와 관계를 생성한다. 이번 전시 인터뷰에서 장세진은 “우리 모두는 인간이 되고 싶은 욕망, 보여지고 말하고 싶은 욕망, 집과 공동체를 찾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가능성과 불가능성 사이에서, 비당사자적 말하기는 그 균열의 지점을 가로질러 실재간의 접촉과 만남을 발생시킨다. 결국 타자의 고통에 직접 참여할 수 없으면서, 타자의 고통을 증언하고 현실의 폭력을 고발하는 말하기는 그저 그 목소리를 듣고, 만날 수 있는 윤리적 자리를 매번, 다시, 다른 방식으로 새롭게 여는 일이다. [ ]
앵무 (편집자)
《올 어바웃 러브: 곽영준, 장세진》 라운드테이블: 트래버스: 젠더, 디아스포라, 기억
날짜: 2022년 6월 11일 토요일 14:00
장소: 아르코미술관 스페이스 필룩스
참여: 배주연(모더레이터/서강대학교 연구교수), 오혜진(문학평론가), 조해진(작가), 김일란(영화감독)
협력: 서강대학교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주관: 아르코미술관
주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이 글은 동무비평 삼사가 2022년 주제로 의뢰한 ‘디아스포라’ 관련 원고입니다.
* 이미지 출처는 아르코미술관 홈페이지입니다.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실제보다 리얼한 : 다르덴의 영화 속 이민자의 형상들, 변화들 (0) | 2022.07.31 |
---|---|
미술에서의 디아스포라 : 제인 진 카이젠(Jane Jin Kaisen)작가와 작업 중심으로 (0) | 2022.07.31 |
고려미술관, 설립자 정조문 (0) | 2022.05.29 |
어느 누가 욕망에 자유로울 수 있는가 (0) | 2022.05.29 |
방문객들 (0) | 2022.05.2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