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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표류에 기울이는 말

by 동무비평 삼사 2022. 9. 25.

세월이 짙은 이야기를 마주할 때면, 그 두터움을 섬세히 다룰 여러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섣불리 내릴 판단을 유예하고 이야기를 들어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며 계속해서 변모하는 디아스포라 역시 그렇다. 그중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개화기 하와이 이주를 시작으로 중국, 일본, 연해주 그리고 또다시 중앙아시아 등지로 향한 이들의 몸이 조선/한국이라는 경계를 갖고, 도착한 땅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낸 것을 일컫는다. 초기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다룬 미술이 이러한 표지를 지닌 작가가 이주한 장소를 관찰하며 낯선 일상을 그려내거나, 이를 통해 자기 고백적이고 역사화 된 경험을 기록하는 방식을 취했다면, 2010년대 이후 작가들은 세대를 건넌 뒤 맞닿은 현재의 디아스포라를 이해하는 과정에 참여하고자 시도한다. 넘은 시간만큼 이들의 말에는 때로 여백이 놓여 있기도 하지만, 안유리와 이소영은 이 여백을 있는 그대로 흡수하는 것의 힘을 응시한다.

 

안유리, <불온한 별들>, 2018 Ⓒ Yuri An

 안유리는 2016-2019년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주제로 작업을 이어오며, 그 가운데에서도 조선족과 북한이탈주민의 이야기를 들어왔다. 작가는 단박에 편협히 상상할 수 있는 불안정한 경계를 명확히 세우기보다, 이를 세심히 묘사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시어를 사용해왔다. 2016년의 <월강>, <몸>, <말>, <소리>를 모아 3채널로 확장시킨 <불온한 별들>(2018)은 앞선 작업에 비해 인터뷰, 뉴스, 노랫말 등 직접적인 말을 사용하니 이전과 다른 형식을 가진 것만 같다. 하지만 그가 띄우는 연변의 거리와 무수한 간판, 국경을 가르는 철조망, 어쩌면 생경한 대림동의 골목 이미지는 또렷한 이해관계를 상술하기보다 대체로 이러한 상황을 한 발짝 멀리서 드러낸다는 점에서 시어의 성격을 공유한다. 풍경에 가까운 이미지들은 얼굴마저 거리를 두거나, 들리는 목소리에서 비껴난 장면을 띄워 국가와 민족을 이해하는 방식이 각기 다르다는 내용을 다시금 하나로 고정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자리에서 다양한 목소리들은 고국, 모국, 조국에 관한 고민에서 출발한 사적 담화를 가감 없이 들려준다. 파편적인 발화들이 조선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사항들을 알려주려는 것이기 보다, 목소리가 남긴 잔상이 계속해서 맴돌며 오해 섞인 익숙함에 균열을 내려는 것이 이 영상이 하는 일일 테다.

 

 풍경 중에서도 흘러가는 물은 꾸준히 안유리의 작업에 등장해온 소재로, 그가 계속해서 따라가는 주제로서 디아스포라의 궤적은 이러한 이미지와 함께 해왔다. <추수할 수 없는 바다>(2015)는 어느 한 순간 돌이킬 수 없게 된 바다 위의 참사를 엮으며 물 위를 맴돌고, <불온한 별들>에서 물은 이동과 경계를 묘사하며 집을 구하는 벽보, 공사를 하는 사람들 위로 중첩되어 이산에 수반되는 상황을 드러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영상 말미에서 역사로 은유되는 강줄기의 뒤집힌 광경과 자기 설 자리가 없다는 음성의 조합도 이러한 이미지의 연장에 있다. 근작 <스틱스 심포니>(2022)는 이산의 상황을 발생시키는 전쟁과 폭력을 겪은 4명의 여성 시인을 다루는 2채널 영상으로, 스틱스는 이승과 저승을 나누는 강을 의미한다. 이 작업은 하나의 국가에서 파생된 이산의 역사가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 놓여 배제된 역사의 굴곡을 공유하는 이들에 대한 기록이고, 이때 이러한 모음은 작가에게 디아스포라에 접근했던 방식과 또 다른 점에서 만나고 있다. 

 

 작업에 등장하는 물이 주는 의미를 묻자 작가는 다음과 같이 답한 바 있다. “출발과 도착, 이곳과 저곳처럼, 강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경계를 가르고 나눌 수 있으나 물 자체의 속성은 그 시작과 끝을 명확히 알 수 없는 순환의 구조이자 미지의 영역으로 느껴집니다. 더욱이 물은 어떤 용기에 담느냐에 따라 무게와 형태도 다르게 보일 수 있는 형상이고요.” [각주:1] 작가는 늘 흩어진 사람들이 머무는 물가에서 자리를 찾지 못해 혼란스러운 대화를 새로운 문장으로 건져낸다. 물이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순환하고 때에 따라 자유로운 형태를 갖듯, 안유리의 작업도 디아스포라라는 둘레 안에서 계속해서 자신을 변주하며 이동하고, 또 나아간다.

 

 이소영은 2011년 카자흐스탄 고려인 4세 작가 알렉산더 우가이와 공동으로 진행한 프로젝트 ‘중앙아시아 고려인 디아스포라 프로젝트 The Future is Coming From All Directions’를 진행한 이후 꾸준히 이주와 정주에 관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자리잡기>(2013)는 1937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해야 했던 고려인의 후손인 2-30대 고려인 5세와 나눈 문답을 담은 영상이다. 작가는 이들에게 자리에 착석할 것을 요청하고, 자리에 앉은 이들에게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게 될 때 당신의 생존 전략이나 기술은 무엇”인지 묻고는, 자리를 다시 옮길 것을 요청한 뒤 새로 고른 자리에 앉은 이유와 “자신이 독립한 이후의 모습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만약 이미 독립적이라고 생각한다면 5년 후의 자신의 삶을 예측”해 달라고 한 번 더 묻는다.

 

 보다시피 이는 직접적으로 디아스포라를 겨냥한다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오늘날 2-30대가 한 번쯤 생각해봤을 법한 보편적인 물음이다. 답변을 하는 고려인 5세인 이들은 역경으로 점철된 과거의 디아스포라를 닮아 있기보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후를 걱정하고,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염려하는 동시에 하고 싶은 일을 기꺼이 상상할 수 있는 세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작가의 시선은 역사를 여과한 개인의 모습을 투영시킴으로써 미래를 향한 보편적인 긍정을 던지는 것에 가깝다. 작가는 디아스포라에서 답습하듯 새겨온 전형성에서 의미를 찾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현재를 지켜보는 것을 택하고, 이를 통해 앞으로도 계속 될 다른 방식의 디아스포라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소영, <요새>, 2015 Ⓒ Soyung Lee

 <요새>(2015)와 <디스플레이스드>(2017)는 고려인 디아스포라 프로젝트 이후 이주노동자를 통해, 작가가 이산을 확장해 읽어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작업이다. <요새>에서는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 2명을 포함한 배우 5명이 오래된 여관을 요새로 삼고 집을 둘러싼 대화와 행동을 나눈다. 이들은 이 임시적인 장소에서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집을 묘사하기도 하고, 떠나고 머무는 일을 고민한다. 한편, <디스플레이스드>는 홍콩에 거주하는 홍콩 배우, 필리핀 출신 가사도우미, 캐나다인 댄서가 참여한 퍼포먼스 영상이다. 오늘날의 노동과 결부된 새로운 디아스포라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작업은, 인물들이 서로 다른 장소에서 온 만큼 광둥어, 중국어, 타갈로그어, 영어가 교차된다. 두 작업은 모두 불안정한 거주지를 갖게 된 이들이, 자신이 머무는 곳을 지키고자 엉성한 훈련의 몸짓을 보여주거나 끊임없이 실제 당사자들과 함께 행동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이산을 마주하는 작가의 태도를 계속해서 확인할 수 있게끔 한다. 

 

 영화감독 트린 T. 민하는 자신이 경험한 것 바깥을 말하는 것에 있어 무엇에 ‘관해 말하기(speaking about)’보다 ‘가까이에서 말하기(speaking nearby)’를 권하며, 이것이 대상을 대표하여 발언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동시에 “의미가 형성되는 과정에 여백을 남겨 ... 타자가 그리로 들어와 그 자리를 원하는 방식으로 메울 수” 있게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각주:2] 두 작가의 표류에 기울이는 말들이 가리킨 땅과 이것이 흡수한 목소리가 어디론가 번져나가는 것은 바로 그러한 자리를 채워나가는 일 아닐까. [ ]

 

이예인 (더 스트림 연구원)

 

 

안유리 www.yurian.kr

이소영 www.soyunglee.com 

더 스트림 www.thestream.kr

 

안유리, <추수할 수 없는 바다>, 2015 www.thestream.kr/archives/6483

안유리, <불온한 별들>, 2018 www.thestream.kr/archives/5832

이소영, <요새>, 2015   www.thestream.kr/archives/6784

이소영, <디스플레이스드>, 2017 www.thestream.kr/archives/6781

 

* 이 글은 동무비평 삼사가 2022년 주제로 의뢰한 ‘디아스포라’ 관련 원고입니다. 

* 이미지는 필자에게 제공받았으며, 출처는 작가 홈페이지입니다.

 

 

  1.  THE STREAM Interview #32 : 안유리의 디아스포라, http://www.thestream.kr/archives/9513 [본문으로]
  2. 캐시 박 홍, 『마이너 필링스 – 이 감정들은 사소하지 않다』, 노시내 옮김, 마티, 2021, pp. 142-14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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