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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욕망 주도 기계 - '공장달리기 인천' 이후 돌아보는 신체의 기계성

by 동무비평 삼사 2022. 7. 31.

미국 철학자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가 제시한 기계지향론적 존재론(machine-oriented ontology)에 의하면 우리가 '존재'라 칭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기계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들뢰즈/가타리의 머시니즘(machinism)이 놓여있다. 이것은 작동하는 모든 것이 기계(machine)라는 주장인데, 생명을 가지는 것들을 포함한다. 보다 일반적 의미에서의 기계, 우리가 평상시 기계라 부르는 바로 그 비생명체들의 작동 원리를 일컫는 메커니즘(mechanism)과는 구분하기 위해서 도입된 명칭이 바로 머시니즘이다. 이 이론은 입이나 항문이 어째서 기계인지를 예로 드는데, 어떤 유기적 흐름에 개입하여 그것을 절단하거나 채취하는 것이 곧 기계라는 정의가 따른다. 이 주장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절단'과 '채취'다. 그러한즉슨, 기계가 다른 무엇이 아니고 기계이게끔 하는 기계의 속성은 절단과 채취란 말인가.

 

 나는 이 같은 의문을 어느 기계평론가에 제기했다. 그는 내가 지목한 기계의 속성에 즉각 동의하기보다 '동력을 주었을 때 반응하는 것이면 기계'라는 설명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그리고 들뢰즈/가타리가 보기에 우리의 몸을 추동하는 동력은 욕망이다. [참조: 기계와 기계주의

 

 2022년 6월 18일은 열 명 남짓의 사람들과 함께 인천 만석부두의 공장지대를 달린 날이었다. 각종 기계로 가득한 공장들 사이를 마치 기계처럼 뛰기 위하여 참가자들은 대화조차 삼가기로 했다. 이 자리를 기획한 김재민이는 최근 '오근세의 길'(2021), '용산 공장 달리기'(2021)와 같은 작업을 통해 도시 생태계의 사이클 변화를 몸으로 느껴보기를 권해 왔다. 현재는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입주 작가로서 공장달리기 시리즈의 인천편을 연구하고 기획 중이다.

 "뛴다. 몸으로 공장의 규모를 느낀다. 뛰는 맥박으로 그 시절 노동과 젊음을 기리기 위한 프로젝트이다."라고 기획의도를 밝힌 작가는 인천아트플랫폼에서 도보로 10여 분 떨어진 공장지대에 약 4km의 조깅 코스를 마련해 두었다. 개항도시의 역사와 시대적 산업산물로서의 인천을 가리키기엔 제법 어울리는 장소다. 서울 복판에 살고 있는 나는 휴일의 교통체증을 피해 가장 빨리 그곳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전철을 선택하고 1호선을 탔는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첨단문명의 이면은 이처럼 도시의 화려함으로부터 외면 받고 도시인의 일상적 시야나 의식 바깥으로 밀려나 있다. 외곽의 공장지대를 찾아 지루함을 견디는 시간이 그것을 말했다.

 

 집결지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어느 방 안으로 이동한 뒤, 참가자 중 한 명인 신지아 무용가의 안내로 가벼운 움직임 워크숍을 시작. 동작을 따라하는 동안 우리는 신체 가동범위와 직면했다. 나는 다음 날 옆구리가 뻐근했고, 옆 사람은 다리 스트레칭으로 하마터면 쥐가 날 뻔했다. 짧은 워크숍이 던진 메시지를 이렇게 풀이해 볼 수 있을까. 몸 쓰기는 '신체라고 하는 기관을 운영하는 일'이라는 것. 때로는 뜻대로 되지 않음에 맞서서 의지력을 발휘하고, 통제권한을 탈환해야 한다는 것. 또한 그것은 이 방을 벗어나서 곧 펼쳐질 공장지대 풍경이 암시하는 은유로서의 기계성 ― 나란한 공장들 사이에서 기계로 재현된 신체 ― 을 넘어, 감각으로서의 기계성을 먼저 실감하라는 지령이었다.

Der Mensch als Industriepalast(1926), Fritz Kahn 『Maschine Mensch』 수록

 이후 마주하게 된 생각을 나누려 한다. 나는 오랫동안 몸과 대결하고, 쾌락에 저항했다. 스스로 정한 운동량을 충족하기 위해 새벽에 걷거나 일부러 머나먼 직장을 골라 집과 일터 사이를 왕복하는 동안 나는 스스로에게 기계처럼 살 것을 명령했고, 차츰 금욕주의자로 알려지게 됐다. '기계처럼' 산다는 것은 스토이시즘과 연결되곤 한다. 기계성은 차갑고, 딱딱하고, 규율에 종속돼 있고, 쾌락과 대립된다는 인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쾌락을 희생하는 금욕주의자의 모습과 중첩된다. 그런데 (들뢰즈/가타리에 의하면) 정작 몸의 기계성은 '욕망'이라는 동력의 결과가 아니던가. 욕망은 욕구와 달리 생존본능이나 효율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욕망은 쾌락원칙을 전제한다. 그러니 쾌락을 떼어놓고서는 신체를 기계로 볼 수 없는 아이러니에 처한다.

 

 체중 감량을 해 보면 안다. 몸에서 꼭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영양소만 섭취하겠단 이성적 결심을 송두리째 흔드는 원흉은 혀끝 미뢰에서 발생하는 말초적 쾌감이다. 거기에 휘둘려 절제 없이 먹고 속이 더부룩해진 다음에야 우리는 비로소 상기한다, 기쁨과 아픔은 (개념적으로는 아주 다를지라도 감각적으로) 분간하기 어렵다고. 중독을 유발하는 도파민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한 의학자 애나 렘케(Anna Lembke)의 분석이 이를 뒷받침한다. 우리 뇌에서 쾌와 불쾌를 담당하는 부분은 연결돼 있어서 불쾌감을 쾌감으로 오인할 수 있는데, 상습적인 도파민 자극은 불쾌감마저 쾌감으로 알고 해로운 행동에 중독되게 만드는 악순환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기계성을 오염시키는 쾌락의 배후에 공교롭게도 다시 화학적 기계논리가 있다는 것은 신체-기계성과 욕망-동력을 역시 완전히 분리되지 못하도록 한다.

 

 그러니 묻지 않을 수 없다. 쾌락으로부터 주도권을 되찾겠다고? 그러려고 벌인 단호한 실천은 정말 기계를 닮았는가? '김보슬 기계설'은 정당한가? 기계는 차가운가? 이런 물음 앞에서 비로소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기계가 뜨거우면 뜨거웠지, 왜 차갑겠냐는 역설이다. 치열하게 가동 중인 CPU일수록 고온으로 가열돼 있지 않은가.

프로그램 진행 장면

 김재민이의 '공장달리기 인천'은 암묵적으로 러너스하이(runner's high)를 요청한다. 러너스하이는 열심히 달릴 때에 주자에게 찾아오는 깊은 도취감을 말한다. 달릴수록 희열과 상쾌감이 배가되는 것이다. 종교 의식이나 축제 중 빠지게 되는 트랜스 상태와 비할 만하다. 작가가 공장 사이를 달리면서 들어보라고 추천했던 음악이 심장박동을 연상케 하는 트랜스 장르인 것도 우연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그렇게 도취된 상태에서, 빨라진 심장이 펌핑해 내는 피로 온몸이 뜨거워진 상태에서, 우리는 기계성을 비로소 재고할 수 있게 되었다. "뛰는 맥박으로 노동과 젊음을 기리기 위한 프로젝트"에 가담한 공모자로서, 나는 아직 충분히 기계 되지 못했음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기계가 되고자 한다면 좀 더 열띤 욕망을 발굴하고, 기계처럼 부단히 반응하고, 열심히 달려 뜨거워질 일이 남았다.

달리기 코스 전경

 그러나 여전히 묘연한 것이 있다. 기계의 속성은 절단이나 채취가 아니라 동력을 주었을 때 움직이는 성질이며 뜨거운 생동감이라고 고쳐보게 된 지금, 기계처럼 살아가기 위한 동력을 어디서 구해야 할까. 무엇이 나를 달리게 할까. 점점 더 도시 바깥, 수도 바깥, 강대국 바깥에 남겨지는 공장지대의 플랜트와 내 미약한 신체는 어떤 욕망으로 교차할까. 이 순간도 나는 기계됨을 욕망한다. 적어도 이 욕망만은 있으니 (고장이 나지 않는다면) 어디로 가긴 갈 것이다. 그런데 멈추지 않으려면 계속 욕망이 주어져야 한다. 욕망의 자가발전 기계가 된 많은 영화 주인공들이 파국에 이르렀건마는, 그것이 꼭 정해진 수순은 아니리라. 걱정하지 않는다, 유머는 그 제어장치니까. 웃으며, 김재민이와 달리자. [ ]



김보슬 (네트워커/문화기획가)



2022 IAP 지역연구 오픈랩 프로젝트: 공장달리기 하인천

기획: 김재민이

일시: 2022년 6월 18일 토 19:00

집결장소: 인천아트플랫폼 광장

달리기 루트: 인천아트플랫폼-화수/ 만석부두-북성포구 건너편(거리 5km, 조깅속도 8min/km로30-40분) 

 

*이미지는 필자에게 제공받았으며, 사용 허가를 받고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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