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벌거벗은 고통이 당신 앞에 닥쳐온다. 고통받는 얼굴은 주체의 ‘상처입을 가능성’(vulnerability)에 호소하며 우리에게 응답할 것을 ‘명령’한다. 고통받는 얼굴의 도덕적 명령, 내가 내 삶의 주인이고, 나는 오로지 나만을 위해 살겠다는 독단적 자유에서 벗어나라는 명령. 그 명령에 응답하는 자와 외면하는 자. 기꺼이 상처받으려는 자와 상처를 두려워 하는 자.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에게 윤리적 주체란, 이 고통받는 얼굴 앞에서 자신도 함께 상처 입겠다며 손을 내미는 주체, 타인의 고통에 대한 책임에서 도망치지 않으려는 주체, 그리고 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려는 주체이다. 자신의 ‘상처입을 가능성’을 기꺼이 타인에게 내어주는 것. 그럼으로써 그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두 편의 영화가 있다. <아이카>(세르게이 드보르체보이, 2021)와 <안티고네>(소피 데라스페, 2020). 공교롭게도 이들 영화 모두 ‘낯선 세계’에 던져진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다. <아이카>의 여주인공 아이카(사발 예슬라모바)는 키르기스스탄에서 러시아의 모스크바로, <안티고네>의 안티고네(나에마 리치)는 알제리에서 캐나다로 이주했지만, 그들의 선택이 자발적인 이주건 망명이건 간에, 그들은 자신이 그 낯선 세계에서 ‘무방비 상태’라는 것을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은 고통을 숨길 수 없다. 발가벗은 고통, 그것이 이들 영화에서 보여주는 이주민의 삶이다. 하지만 이들 영화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주민의 삶 자체가 아니라, 이들 영화가 어떻게 이주민의 고통을 표현하는가, 하는 것이다. <아이카>와 <안티고네> 모두 인과적 서사나 그에 기반한 인물의 행동을 통해 관객을 설득하기보다는, 클로즈업으로 포착된 ‘디아스프라의 고통받는 얼굴’을 관객에게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사의 빈틈마다 ‘타인의 고통받는 얼굴’을, 아니 ‘디아스포라의 눈물’을 본다, 그리고 그 때마다 그 얼굴은 우리에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이 고통받는 얼굴 앞에서 당신의 상처입을 가능성을 기꺼이 내어줄 용기가 있는가, 라는, 질문.
<아이카>, 본다는 행위에 대한 믿음
<아이카>는 영화의 시작과 함께 병원에서 도망치는 한 여인의 모습을 비춘다. 그녀는 이제 막 병원에서 아이를 출산했다. 아이에게 젖 한번 물리지 않고 도망친 그녀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닭 가공 공장이다. 성치 않은 몸으로 닭털을 벗기는 아이카의 모습에 숨이 턱하니 막힌다. 설상가상 돈을 주기로 한 업주가 도망쳐 2주치 월급마저 떼인 그녀가 향한 곳은 아기가 있는 병원이 아니라 모스크바 뒷골목의 허름한 호스텔이다. 커튼으로 방 하나를 여러 공간으로 나눈 곳, 그래서 몸 하나 뉘이면 그만인 그곳에서 아이카는 고드름을 떼어 아랫배의 출산열을 식힌다. 이후 우리가 마주하는 아이카의 모습은 이 처참함의 반복이다. 하혈하는 몸으로 일자리를 찾아 나서고, 쫓겨나고, 다시 일자리를 찾아 폭설로 뒤덮인 모스크바의 거리를 헤맨다. 재봉가게를 차리기 위해 돈을 빌린 사채업자가 찾아오고, 안 그러면 동생의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협박하는 상황까지 더해진다. 영화의 후반부, 그녀는 끝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사채업자에게 자신의 아이를 넘기겠다고 약속한다. 폭설로 꽉 막힌 모스크바의 겨울을 닮은 삶, 그것이 키르기스스탄에서 러시아 모스크바로 불법 이주한 아이카의 삶이다. 더 끔찍한 것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녀가 이 잔혹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이다. 그녀의 미래는 영원한 폭설에 갇혔다.
‘세르게이 드보르체보이’ 감독은 키르기스스탄 출신 여성이 모스크바의 산부인과 병원에 한해동안 버린 아이가 무려 200명이 넘는다는 기사에서 <아이카>의 모티브를 얻었다. 세르게이 드보르체보이는 이 사실(결과)에서 이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환경(원인이나 이유)에 대해 서사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아이카>가 결과(행위)를 먼저 제시한 후 그 원인(이유)을 보여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이카>는 원인과 결과의 순서를 뒤집는다. 우리는 먼저 행위(또는 결과)를 본 후 한참 후에 그 이유(또는 원인)를 알 수 있다. 아이를 두고 병원에서 도망친 아이카의 행위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 이유를 한참 뒤에야 알게 되고, 아이카 아기의 아버지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그 아기를 어떻게 갖게 됐는지 알게 되는 것 역시 영화가 끝날 무렵이다. 결과와 원인 사이의 공백, <아이카>는 이러한 ‘서사적 공백’을 통해 ‘관객의 자리’를 마련한다. 그는 어떤 결과의 원인(이유)을 유추하는 위치에 관객이 자리하기를 원한다. 그는 핸드헬드와 롱테이크, 클로즈업을 활용해 세계 주변부에 위치한 아이카를 프레임의 중심에 세우고, ‘날것 그대로’의 삶을 보여준다. 이 때 ‘날것 그대로’라는 표현은 다큐멘터리적인 표현을 의미한다기보다는 해석 이전에 모호한 상태로 출현하는 미결정 상태의 현실, 뚜렷한 의미의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의 현실에 더 가까운 의미이다. 그러니까 관객은 해석되기 이전의 ‘날것 그대로’의 상황을 마주하며 그에 대해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그것은 영화가 아이카의 얼굴을 보여주는 방식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늘 화면을 채우고 있는 아이카의 얼굴을 보지만, 영화는 인물에 대한 심리분석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고통받는 아이카의 얼굴을 마주할 뿐이다. 그런데 누군가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재현할 때, 우리는 흔히 ‘창작자의 윤리’를 요구하곤 한다. 그것이 사진이든 영화이든 간에 카메라는 사각의 프레임 속에 세계를 재단하는 매체이다. 그리고 그것을 끌어 모아 (그것이 타인의 고통이라 하더라도) 시각적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렇기에 시각적 매체는 대상을 폭력적으로 사물화화는 ‘포르노그래피’로서의 위험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창작자의 윤리’가 요구되는 이유다. 하지만 창작자의 윤리가 있다면 그 이미지를 마주하는 관객의 윤리도 존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이카가 골목길의 고드름을 떼다 출산열을 식히며 잠이 든다. 그 날 새벽 아이카의 휴대폰 소리가 울리며 호스텔에 거주하는 모두의 잠을 깨운다. 출산열의 고통으로 온몸을 땀으로 적신 아이카의 모습을, 힘없는 얼굴로 일어나 물을 벌컥 삼키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하니 막히는데, 어서 전화를 받으라고 그녀를 재촉하는 휴대폰 소리를 듣는 일은, 그리고 그 처참한 상황에 놓인 아이카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너무나 힘겨운 일이다.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려 그 상황을 모면하고 싶었다. 누군가의 고통에서 눈을 돌리려는 이 비겁함은 얼마나 비윤리적인가? 『무정한 빛: 사진과 정치폭력』(바다출판사, 2018)에서 수지 린필드가 지적한 것처럼, 고통의 이미지가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라고 말할 때, 동시에 그 속에는 ‘이것은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고통받는 이미지에서 고개를 돌려 회피한다면, 그것은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회피하는 일, 그러니까 고개를 돌림으로써 그 폭력의 상황을 묵인하려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아이카>의 카메라는 그녀가 사각의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녀를 끝까지 프레임 속에 ‘붙들어 맨다’. 살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아이카만큼이나 폭설로 가득한 거리의 카메라 역시 위험을 각오하고 이리저리 움직인다. 단 한 순간도 그녀를 놓칠 수 없다는 듯 카메라는 그녀를 프레임에 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아이카>의 카메라는 그녀의 고통 앞에서 결코 회피하지 않는다. 아니, 자신의 위험마저 온전히 떠안으며 아이카를 바라본다. <아이카>의 카메라가 그녀의 ‘고통을 마주하는 고통’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를 깨달은 것은 영화의 엔딩에서였다. 아이를 사채업자가에게 넘기기로 했던 아이카는 아이를 데리고 도망친다. 그리고 어느 건물 한켠에서 아이에게 처음으로 젖을 물린다. 그리고 그제서야 눈물을 터뜨린다. 그렇게 아이카는 엄마가 된다. 한마디로 <아이카>는 누군가에게는 자연스러운 과정인 ‘엄마 되기’가 이주민에게는 얼마나 큰 결단일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하지만 우리는 이 장면에서 ‘본다는 것’의 힘을 기억해야 한다. 영화 중반부, 어느 동물병원에서 일하던 아이카는 상처난 몸으로 새끼에게 젖을 물리던 어미 개를 한참이나 바라본다. 그렇다면 상처난 몸으로 새끼에게 젖을 먹이던 어미 개를 ‘바라보는’ 아이카의 시선과 울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아이카의 ‘행위’가 무관한 것일까? ‘보는 행위’가 ‘실천적 행위’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 비록 보는 행위와 실천적 행위 간에 필연성을 상정하는 일만큼 미련한 일이 없다 해도, <아이카>는 ‘본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버리지 않는다. 그것이 고통받는 얼굴에서 회피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자, 그것이 관객의 윤리인 이유다.
<안티고네>, 얼굴이라는 연대의 계기
그리스 신화(또는 소포클레스의 그리스 비극) 속 안티고네는 두 유형의 법이 충돌하는 세계의 갈등을 다루는 이야기의 원형이다. 신화 속 안티고네는 도시의 질서를 위협했던 둘째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 위에 세줌의 흙을 뿌려 금지된 장례를 치른다. 장례를 금지한 크레온의 명령이 땅의 법이라면, 안티고네가 따르는 것은 하늘의 법이다. 안티고네는 (그가 어떠한 자이든) 죽은 자에게 제의를 바쳐 그의 영혼을 기리는 것이 이 세계의 정의이자 법이라고 믿는다. 하나의 세계, 두 개의 법. 신화 안티고네를 원형으로 하는 <안티고네> 역시 이 충돌하는 세계를 고스란히 영화에 가져온다. 안티고네(나에마 리치)는 캐나다에서 알제리로 추방당할 위험에 처한 둘째 오빠 폴리네이케스(라와드 엘 제인)를 대신해 감옥에 갇힌다. 알제리에서 망명한 안티고네 가족이 그곳으로 돌아간다면 생존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안티고네는 그저 그 위험에서 둘째 오빠를 지키고 싶을 뿐이다. 그녀는 거창한 목표를 위해 싸우는 투사가 아니다. 그것이 세상과 불화한다 해도, 그녀는 그저 자신이 지켜야 한다고 믿는 것,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심장이 시키는 것’(하늘의 법)을 위해 싸운다.
<안티고네>는 관객을 바라보는 안티고네의 얼굴로 영화를 시작하고 끝맺을 만큼 얼굴의 힘을 믿는 영화다. 무언가를 지키고야 말겠다는 의지도, 그리고 그 믿음이 배신당한 순간의 절망과 두려움도 모두 안티고네의 얼굴에 고스란히 새겨진다. 안티고네의 얼굴은 관객을 설득하는 가장 큰 힘이다. <안티고네>가 관객과 어떤 연대감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나에마 리치’가 연기하는 얼굴의 힘 덕분이다. <안티고네>는 왜 세상의 모든 오브제 중에서 인간의 얼굴이 가장 소중하고 숭고한 오브제로 다루어져 왔는지 느낄 수 있을 만큼의 정서적 울림을 준다. 나에마 리치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잔 다르크의 수난>(칼 테어도르 드레이어, 1928)에서 잔다르크를 연기한 ‘마리아 팔코네티’를 상기시킬 정도다. 얼굴의 힘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안티고네>가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은 작품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간과 인간이 연대할 수 있는 장소로서의 얼굴, 그리고 그에 대한 믿음.
<안티고네>는 구렁텅이에 빠진 자가 더 깊은 구렁텅이에 빠진 자를 향해 손을 내미는 영화다. 영화 <안티고네>가 안티고네를 이스메네의 언니가 아닌 동생으로 각색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그러니까 영화는 안티고네를 가장 어리고 약한 자로 위치시킨다. 그런 그녀가 자신보다 더 보잘 것 없는 자, 결코 환대할 수 없는 자에게 손을 내미는 ‘무조건적인 연대’의 고결한 욕망을 보여주려 한다. 안티고네를 사랑하는 하이몬(앙투안느 데로쉬에)의 아버지는 안티고네에게 왜 오빠를 위해 자신의 자유와 미래를 희생하려 하는지 묻는다. 안티고네는 망명하던 그 날 캐나다 공항에 입국할 때, 둘째 오빠가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리던 모습을 그 이유로 이야기한다. 어쩌면 안티고네의 기억 속에는 어린 시절 둘째 오빠의 그 모습이 가장 연약한 존재의 이미지로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그렇게 더 아래쪽으로 연대의 손을 뻗고, 그때마다 그녀는 집행유예의 기회를 잃고, 시민권도 잃고, 모든 것을 잃는다. 그렇게 산 채로 무덤으로 걸어 들어간다.
물론 안티고네는 혼자가 아니다. 그녀에게 다양한 연대의 손길이 이어진다. 이러한 면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안티고네의 할머니가 청소년 보호시설에 갇힌 손녀를 위해 매일같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그 앞을 지나가는 이들뿐 아니라 (아마도) 동일한 상처에 아파하는 가족들이 할머니의 곁에 몰려들어 함께 노래를 부른다. 어쩌면 이 장면은 <안티고네>를 연출한 ‘소피 데라스페’가 꿈꾸는 연대의 단서를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연대의 한 형태라는 것을 인정한다 해도, 이를 안티고네가 둘째 오빠에게 내민 손길과 질적으로 동일한 연대라 말할 수는 없다. 안티고네의 변호사는 재판관과 검사에 비해 안티고네에게 상당한 호의를 보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법정에서의 ‘절차적 정당성’이라는 한계 안에서 이뤄지는 호의다. 하이몬의 아버지가 안티고네에게 베푸는 호의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속 그 어떤 호의도 이 ‘절차적 정당성’ 바깥으로는 감히 나가지 않는다. 문제는 이주민으로서의 안티고네의 삶은 이 절차적 정당성 ‘외부’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안티고네의 언니 이스메네가 울부짖으며 말하듯이, 정착민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삶조차 이주민에게는 너무 높은 장벽으로 막혀 있다. 그것이 안티고네가 “나는 언제든 다시 법을 어길 거예요”라고 말하는 이유다. 이주민 전체는 사회 외부에 남겨둔 채 예외적으로 안티고네에게만 호의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안티고네가 꿈꾸는 연대가 아니다. 안티고네는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조건들을 뛰어넘는 무조건적인 환대로서의 연대를 꿈꾼다. 이러한 면에서 영화 후반부 안티고네와 하이몬이 ‘철책을 넘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그들은 철책 너머의 잔디밭에서 사랑을 나눈다. 안티고네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선택한 유일한 행위가 ‘철책 너머’의 장소에서 이뤄진다는 것은 안티고네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안티고네>는 연대를 낭만화하지 않는다. 낭만화는 사태에 드리워진 어둠을 감추게 할 위험이 있다. 구조적 모순은 여전히 그대로인데 안티고네만을 예외로 한 호의로 그 사태가 해결된 것처럼 포장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신념으로 세계에 균열을 냈던 신화 속 안티고네의 숭고함과 고결함을 배신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진짜 연대의 시작은 ‘연대의 탈낭만화’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안티고네>가 궁극적으로는 ‘실패담의 서사’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그녀는 끝내 추방된다). 하지만 안티고네의 고결함은 승리에서가 아니라, 패배할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신념을 위한 싸움을 외면하지 않는 그 태도에 있다. 안티고네의 이러한 태도가 크레온의 세계를 무너뜨렸듯이, 소피 데라스페가 원하는 것은 공고하게 돌아가는 이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며 그 불완전성을 들추는 일이다. 어쩌면 안티고네가 그 모든 호의를 거부하고 알제리로 떠나며 비워진 그 자리야말로 이 세계가 균열하는 지점인지도 모른다. 그 균열은 이 세계의 불완전하다는 징표이고, 그렇기에 우리는 균열(안티고네가 떠난 자리)에서부터 새로운 세계를 꿈꾸어야 한다. 그러니까 안티고네가 ‘산 채로 맞이한 죽음’은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지점이고, 그것이 우리가 안티고네의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이유다. 연대의 시작으로서의 고통받는 얼굴. [ ]
안시환 (영화평론가)
아이카 (My Little One, Айка)
개봉년도 : 2021
감독 : 세르게이 드로브체보이
출연 : 사발 예슬라모바, 폴리나 세베르나야, 안드레이 콜야도브
제작국가 : 러시아, 독일, 폴란드, 중국, 프랑스, 카자흐스탄
안티고네 (Antigone)
개봉년도 : 2020
감독 : 소피 데라스페
출연 : 나에마 리치, 라와드 엘 제인, 앙투안느 데로쉬에
제작국가 : 캐나다
* 이 글은 동무비평 삼사가 2022년 주제로 의뢰한 ‘디아스포라’ 관련 원고입니다.
* 이미지는 필자에게 제공받았으며, 사용 허가를 받고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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