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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예술가의 자격

by 동무비평 삼사 2020. 12. 27.

관객들은 그 장면을 보고 싶어 한다니깐?”

 

대학 시절, 국어교육을 전공하던 나는 영화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원대한 꿈을 안고 영화과 복수 전공을 시작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향해 날카로운 칼을 들이대는 사람들일 거라던 나의 순진한 믿음은 영화제작 수업을 들으며 와장창 깨졌다. 수업은 시나리오부터 촬영, 편집 단계까지 각자의 결과물을 공유하고 교수와 학우들의 합평으로 진행되는 수업이었는데, 말이 좋아 합평이었지 사실 교수의 입맛대로 영화를 바꾸는 수업이었다.

 

한 친구는 자신이 어릴 적 성폭력을 당했던 일을 극복하고 싶다며 시나리오를 써왔는데, 교수는 성폭행 장면이 꼭 들어가야 한다며 친구를 닦달했다. 급기야 교수는 남학우들을 한 명 한 명 지목하며, 그 장면이 보고 싶지 않냐고 캐묻기까지 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상처를 극복한 현재의 자신이 과거의 자신을 안아주는 모습을 연출하려 했던 친구는 그렇게 자신의 첫 연출작을 포기했다.

 

이런 수업을 들으며 꽤 오랜 시간 작가 윤리에 대해 고민했다. 교수의 가르침을 반면교사 삼은 자기검열의 잣대는 필요 이상으로 날카로웠다. 고통을 전시하는 장면은 삭제. 누군가에게 고통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도 삭제. 내가 겪어보지 않은 고통은 내가 언급할 자격이 없으므로 삭제. 지우고 지우다 보면 시나리오는 점점 빈약해졌다. 졸업 후에는 조금 더 건강한 고민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한 시나리오 모임에 가입했는데, 여기서도 고민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김기덕의 팬이라던 한 감독의 시나리오에는 여성이 성폭행당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했는데, 피해 장면을 이렇게 무분별하게 전시하면 어떡하냐는 물음에 그는 매번 이런 문제를 고발하기 위한 작품이라고 답하곤 했다.

 

이런 힘 빠지는 합평을 하고 온 다음이면 내 시나리오를 향한 자기검열의 잣대도 덩달아 가혹해졌다. 기획안과 시나리오 초고는 여러 지원 사업에 선정되며 인정받았지만, 필요 이상으로 엄격한 잣대 속에 수정된 시나리오에는 초고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았다. 그렇게 나는 두 편의 연출작을 외장 하드에만 고이 모셔놓은, ‘한때의 감독 지망생이 되고 말았다.

 

영화감독이 되기를 포기한 나는 문화 재단의 직원이 되었다. 올해 내가 담당한 사업은 이름도 거창한 지역 문화 진흥사업이었는데, 시민 모두의 삶이 예술로 풍요로워야 한다는, 이름만큼 거창한 목표를 가진 사업이었다. ‘시민 모두가 예술가라며 아마추어 예술이나 일반인의 예술 체험을 지원하는 사업이 근 수년간 만연했지만, 조금 다른 사업을 하고 싶었다. 타인의 고통을 무분별하게 전시하는 양반들이 예술가랍시고 아마추어 예술을 낮잡을 기회를 또 한 번 양산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생활 문화동아리를 찾는 대신 미싱사들을 찾아갔다.

 

미싱 주변에 둘러앉아 노동운동 시절 무용담을 들었다. 열다섯에 서울에 올라와 새벽같이 오빠 동생들 밥 차리고, 열두 시간도 넘게 미싱을 했다는 이야기를 웃으며 꺼내는 속은 어떤 속일까 감히 헤아려지지도 않았다. 영어로 쓰인 라벨을 거꾸로 달아 창피했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작품 하나가 뚝딱 나왔고, 40년간 미싱을 하며 얻은 직업병을 말하다가 작품 하나가 또 튀어나왔다. 프로젝트를 이끈 강명자 선생님을 붙잡고, 선생님에게 예술은 어떤 의미냐고 물었더니 노동운동 대신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제 나이가 들고 지킬 사람들이 많아져서 전처럼 격하게 운동은 못 하니, 자신들의 삶을 알릴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예술이라고 했다.

 

내게 예술가의 자격이 없다는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예술가의 자격은 이런 분들에게만 주어진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온 사람들,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워온 사람들만이 예술가의 자격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대편에 큰 고민 하나가 새로 생겼으니, 모든 예술가가 껍데기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지역의 예술가를 지원하는 사업 역시 내 담당사업 중 하나였는데, 예술가들이 말만 번지르르한 껍데기로 느껴졌다.

 

2019 동무비평 삼사 세미나 진행 이미지

고민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올해 사업을 종료할 뻔했는데, 뜻밖의 곳에서 답을 찾았다. 임시공간에서 진행하는 <동무비평 삼사>에 들렀다가 안시환 영화평론가의 영화를 본다는 것, 영화의 쓸모를 듣게 되었다. 그는 시각적으로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진 시대에 영화가 자신의 쓸모를 잃지 않을 방법으로 관객의 자리를 만들어낼 것을 제안한다. 단순히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왜 저렇게 보여주는지끊임없이 궁금하게 만듦으로써 관객들이 생각하고 판단하게 만드는 것이 영화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그는 영화 <사울의 아들>을 예로 들며, <사울의 아들> 이전의 많은 영화가 아우슈비츠를 재현했지만, 사람들이 고통에 대해 반응하고 사유하고 움직이게 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말한다. 반면 <사울의 아들>4:3의 화면비, 제한된 구도, 아웃포커스 등을 통해 관객들이 보고 싶어 하는 익숙한 이미지에서 벗어나며 관객들이 끊임없이 사유하도록 만든다고 말한다. 그는 관객의 자리를 만들고 사유할 틈을 만드는 영화를 옹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의 오랜 고민에 대해서도 아주 명쾌한 답을 들려주었는데, 영화의 본질은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보여줄지 말지를 고민하기보다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고도 했다.

 

오랜 고민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예술가의 자격은 고통의 당사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예술가가 되지 못한 이유는 고통을 경험해보지 못해서도 아니고, 고통의 당사자가 되지 못해서도 아니었다. 단지 나는 고민이 부족했을 뿐. 예술가의 자격은 고통의 당사자가 되는 것에 있지 않고, 고통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 어떻게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데에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더는 예술가가 되기를 꿈꾸지 않지만, 계속해서 예술가 주변을 맴돌며 일할 앞으로의 시간을 위해, 예술가의 자격에 대한 답을 늦게라도 찾게 된 것에 감사한다. [ ] 

김진아

 

행사: 영화를 관람하는 시선, 또는 보고자 하는 욕망에 내재한 가학성, 또는 외설성

일시: 2019.12.22

발제자: 안시환

장소: 임시공간

참고 : 동무비평 삼사 비평워크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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