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공간이든 절대적으로 ‘빈 공간’이란 없다. 비어있을 수 없다. 현재의 소리, 향, 이미지. 온도, 사람, 물건들이 공간 안에 머물러 있다. 과거의 공간 또한 마찬가지이다. 절대적으로 기억할 순 없지만 머물러 있던 시간이 있고, 기억이라는 엄청난 것이 존재하고 줄곧 있어왔다. 공간은 사람을 의미한다고 했던가. 숨 쉬고 생각하고 실천하고 머무는 자리마다 살아온 시간과 어떠한 역사를 대하는 태도, 생각이 스며있다. 각자의 서사가 스민 공간을 캔버스에 꾹꾹 담아내는 고진이 작가의 작품에는 작가의 기억만이 아닌 작품을 보는 이로 하여금 과거의 그것을 스스로 끄집어내어 새롭게 쓰는 또 다른 서사가 그려진다.
달그락달그락 접시와 포크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린다. 너나할 것 없이 쏟아낸 자신의 서사들로 나쁘지 않은 소음들이 계속된다. 공간의 기능성이 변모하여 한시적이었던 예술가의 서사가, 감상자의 서사가 무한히 새롭게 탄생하는 공간으로의 초월성이 발현되는 곳이 있다. 손님들의 머리 위 안정적으로 걸려있는 작품들로 시각과 존재가 결합되어 기억의 무한함이 각각 사유화되어 인천 부평의 ‘카페 밀레’는 시각예술로서 서사의 장이 되고 있다. 이 공간에서 고진이 작가의 개인전 이 펼쳐지고 있다. 전시는 1층 카페와 지하 갤러리 두 공간, 관조적이거나 주체적이거나 한 두 공간에서 하나의 주제를 가진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는 시간 말이다.
파스칼 키냐르 <심연들> 중 ‘생각이 하염없이 떠돌다가 문득 강렬한 흥분에 사로잡히는 포근한 침묵의 세계이며 아른하고 희미한 빛의 세계다’라는 문구를 인용하여 고진이 작가는 ‘기억의 세계’를 묘사한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와 끊임없이 상실되는 현재의 기억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온전히 존재하는 것은 기억에 남은 과거의 공간뿐이다. 이러한 기억은 과거 실존했던 미세한 기억과 담론들이 모여 그만의 기억으로 빚어낸 거대한 서사가 형성된다. 중첩된 시간의 흐름속에 시각적인 것은 점점 흐려지고 비가시적인 요소가 더해져 경계는 모호해지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확장의 영역이 펼쳐진다.
작가는 과거의 거대한 서사를 색을 겹치고 겹치고, 색을 쌓고 쌓아 캔버스라는 유형의 기억저장고에 차곡차곡 담아낸다. 유형의 기억저장고에 한 겹 한 겹 옮겨진 색 덩어리들의 잔상은 기억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처럼 기억의 공간을 비춘다. 저마다 다른 빛을 발산하고 있는 색들은 시간의 중첩된 기억의 공간이다. 작가는 시간의 흐름 속 각자의 기억들을 표현하기 위해 선명한 터치를 뭉개고 그 위에 뭉글한 터치를 덧입혀 발현된 색을 탐색하는 과정들을 거친다. 구체적이며 구현 가능한 기억을 묘사하기보다 그 시간의 공간 속 서사들을 색으로 표현하는 것에 더욱 집중한다. 시간은 흘러가기 마련이고 어떠한 공간도 변질없이 존재하기는 어렵다.
형태가 있어 유한한 물리적인 공간은 시간의 흐름 속 상실되기 마련이지만 화면에 꾹꾹 눌러 담아 구현된 기억의 공간은 그만의 서사를 가지고 심연 속에서 무한히 존재한다. 이 심연 속 무한히 존재하는 기억의 서사는 색을 겹치는 과정을 통해 개념적 관념들로 전환된 시각적 반영을 통해 유형의 것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켜켜이 쌓여 채워져있는 색들의 결과물들은 가득 차있으나 비어있는, 비어있으나 결국은 감상자 스스로 꺼내어 채워넣는 관념적 행위들로 인해 상실하였으나 영속적인 가능성을 가진 무한한 서사가 새롭게 쓰여지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이 맺혀있는 기억의 공간을 빛나는 공간 밀레에서 관람하는 이가 빛나던 지난 날을 발견하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어가길 바란다”는 작가의 말처럼 우연한 감상자들은 전시를 통해 심연 속 기억의 조각들 하나하나를 그만의 대서사로 기록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
로렌킴
전시: Space in Shining
기간: 2020.01.01. - 2020.02.29
장소: 카페 밀레 (인천 부평구 경원대로1130번길 7)
작가: 고진이
*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했으며, 사용 허가를 받고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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