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생인 막내가 ‘BTS’의 노래를 틀어달라고 한다. 방탄소년단 춤을 배웠는데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다. 온 가족이 기대에 차서 막내를 보기 시작했는데 두 마디를 꼼지락거리더니 차렷 자세로 멈추어 선다. 왜 멈추는지 묻자 오늘은 여기까지 배웠단다. 아이들은 9월부터 송년 발표회를 위한 공연을 준비한다. 부모님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어려운 동작도 열심히 따라 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풍이 들었다 낙엽이 돼 바닥에 뒹굴고 첫눈이 내리는 시간만큼 아이의 춤 실력은 쌓였다. 두 마디에서 한 곡 전체를 출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2019 레시던시 입주작가 결과보고전 <2019 플랫폼 아티스트>이 열리는 인천아트플랫폼으로 향하던 날, 유치원에서 배운 데까지 가족에게 보여주던 막내의 얼굴과 칭찬을 잔뜩 기대하던 자신만만한 표정을 떠올렸다. 레시던시 입주작가 결과보고전 또한 막내의 송년 발표회 성격과 비슷한 전시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전시는 인천아트플랫폼 레시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한 국내외 시각예술 부문 입주작가들(권도연 등 20팀)이 입주 기간 동안 쌓은 예술 창작의 결실을 시민들에게 선보이는 자리이다. 아이들과 나는 20팀의 시간을 탐험해 보기로 했다.
전시장 1층에 들어서자 권도연의 작품 <섬광기억 #콩나물1>이 눈에 들어왔다. 작가 권도연과 어릴 적 동네 쓰레기장 근처에서 만난, ‘작고 마른 흰 개, 콩나물’은 어떤 관계였을까. 시간의 흐름은 기억을 퇴색시킨다. 그러나 개와 쓰레기는 그에게 ‘섬광 기억’으로 생생히 남아 작품이 되었다.
서로 다른 상징을 담은 액자 30개가 걸려있었다. 송민규 작가는 인천지역 밤의 풍경에서 발생한 소음과 시각적 기호를 수집한 뒤, 그래픽 데이터 기호로 변환하는 과정을 거쳐 30개의 이미지를 구성했다. 30개의 회색 기호를 보고 있으니 풍경 회화 <회색개론 part 3-01>을 악보로 공연예술 부문의 입주작가 지박과 협업한 전시회 오프닝 퍼포먼스가 새삼 궁금해졌다.
내가 말하는 것을 상대가 정확히 알아듣는다면 오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화자와 청자의 간극은 어찌 보면 필연적이다. 작가 박경률은 회화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와 그것에 비켜 도망치는 작가의 아슬아슬한 틈을 작품 <내러티브의 유령>으로 이야기했다. 간극은 관객들 사이에서도 발생했다. 딸아이와 작품을 보고 이게 무엇인지 알아맞히기를 했는데, 틈이 반복적으로 나타나 우리는 이내 놀이를 포기하고 말았다. 딸아이와 나의 경험과 생각이 다르니 같은 것을 보고 있다 해도 균질하지 않을 것인데, 그것을 굳이 맞춰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2층에 올라가 박성소영의 작품 <박테리얼리티>가 눈에 들어오자마자, 우리는 동시에 “저거 그거야, 샤워 호스”라고 외쳤다. 샤워 호스로 작업을 했다는 것에 놀랐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샤워 호스를 활용하여 영원히 존재하는 박테리아나 우주적인 이미지를 모티브로 시공간의 원형을 상상해보고, 학습된 시간의 방향성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시도를 드러낸다’라는 것이다. ‘내러티브의 유령’은 산재해 있었다.
“아~~, 아~~~….”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소란을 피워 쫓아 가보니 아이들은 작품과 소통하는 중이었다. 작가 이성은은 를 통해 ‘나’라는 ‘자아’를 ‘소리’로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마주 보고 있는 벽 사이에 놓인 의자에 앉아 VR헤드셋을 쓰고, 소리 내어 말하는 바로 그 순간 반대편에 존재하는 ‘나’와 마주하며 순간의 ‘자아’를 체험할 수 있게 구성했다. 아이들은 자신들을 위한 장치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소리를 내야 본인의 형상이 확인되는 순간을 한참이나 반복했다. 나 또한 자주 경험한다. 새벽 알람 소리에 깨어 내가 나인지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화장실 거울에 비친 피사체를 확인하고서야 ‘내가 여기 있구나’라는 확신하곤 한다. VR헤드셋을 쓰고 ‘아~’라고 소리를 내자 내가 보였다. 내가 여기에 있지만 내가 소리를 내야 내가 보이게 한 설정은 ‘내가 나로 살면서 나를 잊고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내가 나대로 나를 보지 않고, 상대의 반응에 따라 나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나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소리든 이미지든 신호를 통해 ‘나’를 찾아가는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B동 전시장을 나와 윈도우갤러리를 거쳐 E동 창고갤러리로 향했다. 천장에 매달린 화려한 죽부인이 인상적이다. 7개의 죽부인을 엮어 꽃처럼 구성하고 LED 전구로 꾸몄다. 케잇 허스 리는 <세븐 시즈터즈와 생명의 연꽃>으로 육각형과 균일한 간격으로 서로 겹치는 원들의 배열을 통해 시공간의 근본적인 형태를 묘사했다. 물론 아이들에게는 작가의 심오한 의도가 중요하지 않다. 반짝이는 스마트폰 액정을 특히 좋아하는 아이들은 LED 전구로 반짝이게 꾸민 ‘죽부인 작품’이 예쁘다고 좋아했다.
송주원은 단채널 비디오 <나는 사자다>로 개인적 장소에서 비롯된 시간과 이야기에 주목했다. 다세대 주택의 옥상, 한 여성이 춤을 춘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춤이 계속된다. 어둠과 밝음으로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알 뿐이다. 한참을 보고 있으니 시공간이 왜곡되는 것 같다. 시간이 흐름과 비교해 공간의 변화가 없어서 그런 것일까.전시장을 빠져나오며 아이들에게 오늘 우리가 본 전시회는 입주작가들이 작품 활동의 결과를 발표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더니, 아이들이 “작가들이 엄청나게 떨렸겠다”라며 호들갑을 떤다.
24시간, 모두의 하루다. 시간만큼 만인에게 공평한 것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각자가 시간을 느끼는 방식은 심리적인 요소 또는 감정의 변화에 따라 ‘개인적’으로 흘러갈 것이다. 우리 막내에게 이번 하반기가 ‘BTS의 시간’이었던 것처럼, 작가 개인에게 인천아트플랫폼에서의 시간은 어떤 시간이었을지 그들이 ‘흘려보낸 시간을 머금은’ 작품을 본 관객은 더욱 궁금할 따름이다. [ ]
김경옥
전시: 2019 레지던시 입주작가 결과보고전: 2019 플랫폼 아티스트
기간: 2019.11.14 - 2019.12.15
작가: 권도연, 랴오 차오차오, 문소현, 미미, 박경률, 박성소영, 박아람, 박희자, 비센테 몰레스
타드, 송민규, 송주원, 송주호, 윤두현, 윤성필, 이민하, 이성은, 정상희, 정희민, 차승언, 케잇 허스 리
장소: 인천아트플랫폼 전시장 일대
*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했으며, 사용 허가를 받고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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