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섭 작가의 전시장에 가는 길, 어두운 구름이 점점 쌓이더니 아침에 확인했던 일기 예보보다 먼저 비가 내렸다. 작가의 전시 정보를 알리는 플래카드 위로 떨어진 빗방울들은 그가 말하는 ‘껍데기’를 더 질기게, ‘밤’을 더 어둡게 만들어주는 듯했다. 지하에 위치한 제물포 갤러리의 전시장은 이날의 날씨와 퍽 잘 어울렸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어두운 화면 위로 흘러가는 어떤 것들이 가득 차 있다. 그것들은 작품의 틀에 겨우 멈춤을 시도할 뿐이고 여전히 잔잔하게 흐르는 형상으로 존재한다. 작가는 이 형상에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말하지만 분명하고 큰 움직임이 보였다. 어두운 바탕을 지나간 연필, 콘테, 먹 등의 재료들 역시 어두운 색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뚜렷이 말하고 있었다. 작가는 보통 존재하는 것은 ‘너무 밝은 낮보다 밤에 자세히 드러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들이 흘러가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어두운 화면과 흐르는 형상을 선택한 이유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 재료들의 중첩은 작가의 삶에서 지금까지 일어났던 어떤 사건들 대신이다. 엄밀히 말하면 사건들이 남긴 내면의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가 흘러갔고 흘러가며 흘러갈 감정들을 오히려 화면 위에서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재료의 흔적으로 드러나는 또 다른 빽빽한 어둠은 그것을 참 끈질기게 붙잡고 있는 것으로도 읽혔다.
이것은 비단 재료들을 중첩시켜 표현하는 작가의 수행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닌, 그 수행을 감상자에게도 넘긴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먼저 작품의 중간 중간에 있는 응집된 색 덩어리는 감상자의 시선을 붙잡기를 시도한다. 그리고 전시장의 조명에 따라 감상자의 관람 동선에 따라 작가가 표현한 형상들이 흐르고 머무르기를 반복하면서 그 안에서 만들어진 에너지를 증폭시킨다. 이러한 장면은 감상자가 한 자리에서 렌티큘러 필름을 보듯 몸을 반복적으로 움직일 때 더 잘 나타난다. 빛을 받지 않은 곳은 칠흑으로, 빛을 받은 곳은 재료가 지나간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작가의 관조적 수행을 감상자에게 옮긴 것이다. 이렇게 반복적 움직임으로 얻은 시각적인 출렁임은 결국 전시장 전체를 어떠한 막으로 감싼다. 감상자를 훑고 가는 그 기운은 작가가 말했던 형상들의 에너지, 즉 그의 내면에서 온 것으로 아마 작가의 밤을 지켰던 ‘껍데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영문 전시명 ‘Night of Epidermis’에서 알 수 있듯, ‘수면’이나 ‘얇은 표피’ 정도로 표현된 껍데기는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단단한 물질이 아니다. 그렇다고 단단하지 않다는 것은 아닌데, 오히려 그것은 무언가를 감싸고 있는 껍데기보다 촘촘하고 더 질긴 어떤 것이었다. 내면의 감정을 곱씹는 그의 수행은 밤이 되어 비로소 그것이 단단하지는 않아도 질긴 껍데기라는 것을 감상자로 하여금 알게 해준다. 그렇게 작가는 껍데기와 밤이,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고 또 흘려보내며 만들어진 존재를 감상자에게 나눈 것인지도 모르겠다.
전시장을 나오는 길,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어 공기는 어둡고 묵직했으나 그래서 더 좋았다. 작가처럼 어둠을 거뜬히 견뎌낼 껍데기 하나가 생긴 기분이어서 작품명 중 하나처럼 어느 밤도 ‘좋은 밤’으로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작가가 작품을 매개로 감상자에게 내민 껍데기는 어떤 모양이든지 간에 누구에게나 오롯하게 있어줄 것이므로. [ ]
정다운
전시: 껍데기의 밤 _ Night of Epidermis
기간: 2019.11.8 - 2019.11.21
작가: 백승섭
장소: 제물포 갤러리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석정로 212번길 10)
기획: 류성환
주최: 문화창작R.A.연구회, 제물포 갤러리
*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했으며, 사용 허가를 받고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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