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세권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한적한 구도심 주택가, 오가는 사람 없이 텅 빈 광장을 품고 쇠락해버린 재래시장 창고 건물 한 켠에서 전시가 열리고 있다. 안쪽을 드러낸 빈 건물 사이를 뚫고 지나다니는 바람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초겨울, ‘냥들의 친목 두 번째 이야기, 수봉냥이들’ 전시는 이곳을 따뜻하게 만들고 있는 중이다.
‘냥들의 친목, 두 번째 이야기’전은 봄(3.18~4.20)에 배다리 조흥상회 2층 생활사 전시장에서 진행됐던 ‘냥들의 친목’ 전시(참여작가 비니, 이니, 웅이, 지니, 청산별곡, 쿠로, 하미)의 2탄 격이다. 냥들의 친목은 냥이와 멍이의 집사로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나누는 소소한 친목모임으로, 전시에 참여한 7명 모두 집사들이다. 첫 번째 전시가 집사들이 반려동물들과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표현하면서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냥이와 멍이를 자랑하는 전시였다면, 두 번째 전시는 자신의 고양이가 아니라 길고양이들이 주인공이다.
이 전시는 ‘수봉정류장’이 수봉로에 자리잡으면서 3개월 동안 만난 고양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올해 8월 문을 연 수봉정류장은 창작자들의 예술놀이터를 표방하는 공간으로, 예술 창작자 3개팀이 함께 참여해 운영 중인 공유공간이다.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잡은 이곳에서 창작자들은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쓴다. 혼자여도, 누구와 함께여도 괜찮은 이 공간은 창작자들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시민, 그리고 길고양이들에게까지 활짝 열려 있다.
포레스트빈빈, 다이규, 웅, 청산, 하미, 한2, 꿈꾸는 지니 총 7명의 작가들은 인천과 대구에서 모였으며, 초등학생부터 중년까지 나이대도 다양하다. 포스터 한켠 “제물포시장 버스정류장 옆 신성종합인테리어와 성공할인마트 사이 골목길에 전시장이 있습니다”라는 설명이 쓰여 있고, ‘여기쯤’이라고 친절히 표시해놓은 전시 장소 설명에 웃음이 난다.
초행길이라면 찾아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일단 도착하면 알록달록한 방명록과 공터에서 자라는 풀들을 꽂아놓은 꽃병, 전시의 주인공인 고양이들로 만든 엽서와 길고양이들을 위한 후원 모금함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황색 테이프로 붙여놓은 출입문과 가파른(?) 계단을 지나가야 전시를 볼 수 있다.
2층에 도착하면 수봉정류장 앞을 어슬렁거리던 고양이들과 가까워진 기록을 사진에 한 장 한 장 담아낸 작품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사람에 대한 경계심으로 가득하던 눈빛은 시간이 지날수록 친근함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아예 수봉정류장 공간 안으로 들어와 하품을 하고, 책 사이에 누워 편안해하는 고양이들의 태도 변화는 구경만으로도 흥미롭다.
수봉정류장 앞에 마련된 길냥이 급식소에서 밥을 먹는 길고양이를 촬영한 영상, “새끼를 가진 수봉이를 옆에서 살뜰히 챙기던 또봉. 수봉이가 해산한 지 한 달 가까이 되어가는데 새끼들의 안부가 궁금하다”라는 작품 설명은 작가들과 고양이의 만남이 특별한 것이 아닌 일상임을 알게 해준다. 사람들이 떠나가고 있는 이 구도심에서 사람들은 살뜰하게 고양이를 챙긴다. 아직 문을 열고 있는 오래된 방앗간 주인 할아버지는 고양이 전용 출입문을 만들어놓았고, 한꺼번에 태어나 올망졸망이라고 이름 붙였던 새끼 고양이들도 있다.
길에서 살아가는 동물만 새 인연을 만난 것은 아니다. 전시장 한 쪽 벽 수도꼭지가 있는 공간에는 푸르른 식물이 잎을 뻗고 있다. 전봇대 밑에서 짓밟히던 식물은 전시 기획자의 ‘금손’에 구조(?)당했고, 이 전시장에서 새로운 생명력으로 왕성하게 크고 있는 중이다. 푸르른 잎사귀 옆에 알뜰하게 보살피던 식물들의 사진이 함께 놓여 있는 풍경은, 식물마저도 새 생명을 얻는 공간의 힘을 느끼게 만든다.
방에 설치된 포레스트 빈빈의 작품은 수봉정류장 급식소를 찾아오는 또봉, 수봉, 고봉, 삼봉이들을 모델로 했다. 빨갛고 까만 콧수염을 자수실로 붙인 작가의 손길에 고양이들의 표정이 생생히 살아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풍잎, 은행잎, 야구공, 땅콩, 귤, 밤송이, 대추 등도 작가의 자수실 수염 덕에 독특한 생명력을 얻어 관람객에게 말을 걸어온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벽에 온통 고양이가 그려져 있다. 고양이에 대한 애정이 가득 느껴지는 하미 작가의 목탄화다. 한 쪽에 놓인 의자에 앉아 거울을 보고 셀카를 찍으면서 봐야만 제대로 보이게 해 놓은 작가의 의도는 관람객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이 공간만큼이나 오래된 거울 한 켠에도 작가가 그린 고양이 그림이 숨어 있다. “길냥이들을 그린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 고백하면서도 길냥이들과 눈맞추며 알게 된 TMI를 방출하는 작품들을 찬찬히 살펴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올라가면 제물포 시장 보여요!”라는 안내에 따라 옥상 쪽으로 올라가면 버려진 건물들과 그 너머로 올라가고 있는 아파트들, 고양이들의 사진이 걸려 있는 빨래줄 뒤로 태양파크빌라가 서 있는 기묘한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제물포시장 일대의 재개발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건너편 도화동에는 하루가 다르게 높은 아파트들이 새로 지어지는 중이다.
신축 아파트의 가격 대신 그곳에서 살아가던 고양이들의 안부가 더 궁금해지는 것, 그 변화만으로도 관람객의 마음에는 이미 물결이 한 번 지나간 셈이다. 관람객도, 작가들도 현실의 풍경은 어찌할 수 없지만, 주변에 고양이들을 비롯해 많은 생명들이 공존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전시의 의미는 충분하다. [ ]
허밍버드
전시: 냥들의 친목, 두 번째 이야기. 수봉냥이들
일정: 2019.11.3. - 2019.11.10
작가: 비니, 이니, 웅이, 지니, 청산별곡, 쿠로, 하미
장소: 제물포시장(인천 미추홀구 숭의동 27-99)
*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했으며, 사용 허가를 받고 게재합니다.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름다운 그 밖의 것 (0) | 2021.01.10 |
---|---|
폐허 속 사물이 이야기하는 것 (0) | 2021.01.10 |
밤이 되어 비로소 그것이 질긴 껍데기인줄 알았다. (0) | 2021.01.03 |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을 다녀와서 (0) | 2021.01.03 |
예술가의 자격 (0) | 2020.12.2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