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뷰

조용히 움켜쥐는 힘에 대하여

by 동무비평 삼사 2021. 2. 7.

어떤 사람들은 같은 이름을 받는다. 평평하지 않은 이분법의 세계에서 같은 단어로 불리는 사람들. 그 중 어떤 이들은, 스스로의 언어로 시간을 소화해 그 풍경 속으로 다른 사람들을 부른다. 기울어진 세계의 뾰족한 성을 버리고 둥근 흔적을 남긴다. 그렇게 이름을 버린 민경이 성을 떼어낸 민경의 전시를 찾았다. 버려야만 오롯해지는 이름에 대한 애정으로.

 

눅눅하고 화려한 인천의 거리를 지나 도착한 임시공간, 관람객을 맞이하는 것은 유리창 너머로 회색 거리를 응시하는 붉은 사진들이다. 표면이 깎여 흘러내리는 붉은 흙의 시간. 깎여나간 토양의 거칠고 불안한 단면은 햇살의 고요한 부드러움과 함께 붙잡혀 평평히 인쇄되어있다. 저항하지 못한 채 쫓겨나듯 옮겨지는 것들을 그러안는 시선 한 줌도 햇살처럼 또 흙처럼 섞였으리라. 조용하고 따듯한 시선을 생각하며 들어선 전시장 내부는 작가가 움켜쥔 시간들로 가득 차있다. 푸른 생명의 시간과 울퉁불퉁하고 붉은 흙의 시간과 평평한 회색조 콘크리트의 시간. 각기 다른 속도를 가진 서로 다른 색의 풍경들은 사진 안에서, 또 전시장 안에서 병치되며 묘한 조화를 이룬다.

 

인간중심의 발전과 개발과 도시의 이름 아래에서 훼손되고 점령되는 말없는 풍경을 작가는 기꺼이 기록했다. 누구에게나 익숙해서 오히려 보이지 않는,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누구도 알아채주지 않는 평범하고도 불안한 풍경은 인간의/인간에 의한/인간을 위한 흰 벽의 전시장 위에 균일하지 않은 높이와 간격으로 가장 납작하게 붙어 공간과 함께 공명한다. 표백된 공간 위에서 서로 연결되며 새로운 시공간을 만든다. 딱딱한 수직의 세계에 완만한 굴곡을 더한다. 그리고 새로운 목소리를 얻는다.

 

현대사회의 불평등한 권력 구조와 그 구조에 대한 암묵적 용인 아래에서 어떤 것들은 언어를 잃는다. 인간중심적인 사회 속 인간 아닌 것들이 그렇고, 이분법의 세계 속 여성의 이름을 받은 사람들이 그렇고, 정상과 보편이라는 기만에 속하지 못하고 소수자와 약자의 이름을 얻은 생들이 그렇다. <그녀와 나의 포물선>은 그런 언어 잃은 것들을 대신하여 읊조린다. 전시장 가운데 우뚝 선 두 개의 붉은 도자 조형물 속에서 흘러나온 차분한 내레이션이 전시장을 가득 채운다. ‘여자’, 두 여성의 삶을 쓴 글이 수록된 사진집인 <그녀와 나의 포물선>16편의 글 중 7편을 낭독하는 목소리는 여자의 시간의 조각들을 건너뛰고 거스르며 반복한다. 그렇게 크고 작은 생의 굴곡은 군데군데 잘려 각각의 포물선으로 겹쳐진다. 파편화된 서사는 잃어버린 맥락만큼 불완전하다고 보일 수 있겠지만, 이야기에 매이지 않은 목소리는 오히려 그 자체로 완전하며 또한 자유롭다. 신도시 외곽에서, 남성의 사회에서, 각자의 시공간 속에서 생을 살아내는 여자’. 두 사람의 이야기는 교차되고 이어지고 섞이며 새로운 행간을 만든다.

두 권의 사진집, <a better home><그녀와 나의 포물선>을 읽고 일어서다 입구 쪽 벽에 내려앉은 둥근 그림자를 발견했다. 천장에 매달린 세 개의 나무 곡선이 공간에 남기는 부드러운 흔적이자 존재의 확실한 증명이다. 천천히 움직이는 세 곡선은 계속해서 변화하는 흙의 시간처럼, 생을 살아내는 여자처럼, 매 시간 조금씩 다른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서로 다른 속도의 공간들이 섞인 사진은, 생의 조각들을 나지막이 읊는 내레이션은, 단단한 붉은 산은, 부드러운 나무 곡선은 공간 안에서 함께 공명하며 어쩐지 그리움의 감각을 이끌어낸다. 무심하게 흘러간 현재의 순간들을 지나 어딘지 모를 미래까지도 그리워하게 만든다. 나의 의지로 택하지 못한 나의 이름 속에서 나의 오롯한 자리를 찾아 떠돈다는 것은, 기울어진 세상에서의 불확실한 생은. 변화하는 현재 속에서 더 나은 내일을 그리워하는 원동력인지도 모른다. 둥근 그림자 아래에서 조명의 희고 말간 빛을 바라보며 그리운 이름들과 지나친 장소들을 되새겨본다.

 

무한하지 않은 땅 위에 물리적인 몸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서로 다른 시공간의 풍경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 떠돌며 세월을 삼킨다. 나에게 무게를 실어주지 않는 저울 위에서 삶을 살아냄은 더 나은 생을 위해 더 많은 것을 끌어안을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생을 더 오래 사랑할 수 있는 다른 길을 만드는 일이다. 작가는 어머니와의 대화 속에서 고단한 이주와 여성의 생뿐 아니라 누구도 적으로 두지 않고서 서로를 이해하려는 애씀과 위로, 삶에 대한 애정을 포착했다고 말한다. 사랑은 사랑으로 발견되고, 사랑은 사랑으로 말해진다. 전시 <그녀와 나는 같은 포물선을 그렸다>은 공간 안에서 무한히 생성되는 새로운 이야기들을 조용히 끌어안는 힘을 가졌다. 그 힘 속에서, 땅에 자리를 얻지 못하고 끊임없이 헤매던 사람들의 고요하고 존엄한 환대를 경험한다. [ ]

 

사랑해

 

 

전시: 그녀와 나는 같은 포물선을 그렸다 She and I drew the Same Parabola

기간: 2020.09.15. - 2020.09.27

작가: 민경

장소: 임시공간

참고: 인천문화재단 2020 예술표현 지원

 

*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했으며, 사용 허가를 받고 게재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