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우리에게 한국 문화의 정체성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분명 난감할 것이다.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엄밀히 말하면 그간의 학습된 지표들이 무수히 떠오르지만, 이미지들의 기원을 추적해 볼수록 의문은 더 커질 뿐이다. 정체성은 자연 발생적이었을까, 국민국가와 지자체 정책의 발명품일까, 이 기호들을 어떻게 범주화 할 수 있을까 등. 이런 당혹스러운 고민을 하는 와중에도 문화적 정체성과 관련한 담론은 동시적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 중이다. 가장 가깝게는 K-문화 패러다임이 증식 중인데, 주로 경제적 이익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K-문화는 다종다양한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K라는 알파벳 하나로 압축하여 진귀하고도 간편한 방식으로 세계 곳곳으로 파생되고 있다. 그 압축의 유의미함에 대해 그다지 진지한 논의가 펼쳐지지 않는 아이러니도 물론 목도 중이고.
부산사람인 필자는 부산에서 문화 축제를 직간접적으로 기획하고, 참여해왔는데 매해 여러 단위에서 부산의 정체성을 행사에 녹여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를 어떻게 물리적인 이벤트로 구현해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었지만, 그간 부산의 정체성이라 불리는 것들- 사투리, 피란도시, 항구도시, 영화의도시, 향토음식과 같은 규정된 로컬 이미지를 피상적으로 구현하는 것 외에는 크게 다른 방향성을 찾지 못했다.
이런 고민을 하는 와중에 문뜩 그 정체성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이 생겼다. 국민국가로서 한국의 정체성이 ‘K’에 농축되어 인지되는 것과 유사하게 ‘부산적인 것’이라는, 마치 선험적으로 존재해온 로컬 정체성이 ‘부산’의 도시명과 등가로 인식되고 있지는 않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즉 로컬을 이루는 다양한 문화적 자원들의 간극을 살피거나 기존의 자원들에 내포되어 있는 다른 층위의 의미를 고민해보거나, 또 새로운 자원을 발굴하기보다 모두 뭉뚱그려 ‘부산적인 것’, 또는 ‘부산의 로컬 정체성’이라고 명명화하고, 비판적 문제의식 없이 수용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1
하지만 지역에서 개최되는 대부분의 문화축제들은 이런 문제를 검토해볼 여력도 없이 암묵적으로 로컬의 선험적 정체성을 재현하기를 강요받는다. 적어도 행사의 작은 일부분에서라도 로컬 정체성이 구현되어야 하며, 경우에 따라 행사 종료 후 또는 다음 연도 예산 편성 시 중요한 평가 항목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국제 행사라고 해서 상황은 다르지 않다. 오히려 많은 자본이 투여되는 국제 행사는 지역 문화발전, 지역 경제 활성화, 지역사회 통합, 지역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기존 역할뿐만 아니라 지역 정체성 재현의 효과적인 도구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2
국제 행사의 의무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국제 행사는 지역의 세계화 즉 글로컬리제이션이 구현될 수 있는 타당한 장소로서 지역이 국민국가를 건너뛰고 직접 세계 경쟁의 사슬로 진입할 수 있는 쉬운 통로다. 국제라는 타이틀을 띈 지역 축제가 양산되고 있는 것도 유사한 맥락이다. 국제 행사는 ‘지역 정체성’이라는 모호한 아젠다를 물리적 이벤트로 가시화하지만, 그 재현방식을 성찰할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지역 문화를 세계 문화로 승화해야 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신자유주의 이후 중앙 집권적 문화에 대한 저항으로써 ‘로컬리티’를 고민하거나 그 가치에 주목하는 선행 작업 보다, 로컬 브랜드 이미지 구축을 위한 역할이 우선시되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 최대규모의 국제영화제이자 전 세계적인 영화제인 부산국제영화제(이하 BIFF)는 아마 이러한 고민의 중심에 서 있을 것이다. BIFF는 태동지였던 남포동을 떠나 해운대로 터를 옮기면서 그 명성과 무관하게 지역사회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영화인 중심 축제라는 부정적 평가가 커지면서 지역 시민들을 포용하지 못/않고, 일상적 문화 향유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는 현 시점의 문화정책 기조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에 BIFF는 코로나 발생 전인 2019년부터 부산 중구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관객 참여형 프로그램 ‘커뮤니티비프’를 기획했고, 2020년에는 주민들이 자신의 생활권에서 영화제를 즐길 수 있도록 ‘동네방네비프’를 시작했다. 2021년도 영화진흥위원회 국제영화제 평가보고서에 따르면 ‘커뮤니티비프’는 부산국제영화제의 “‘세컨드 브랜드’로서 시민 참여와 문화 향유 및 지역 문화 운동을 목적” 3으로 하며 또한 ‘동네방네비프’는 “도시 균형발전에 기여하고, 지역 특화 브랜드 창출을 지향” 4 한다고 되어 있어 앞서 언급한 지역의 세계화라는 장기적 비전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커뮤니티비프와 동네방네비프는 모두 BIFF의 ‘스핀오프 페스티벌로서 개최 의미가 유사하다. 그러나 커뮤니티비프가 관객이 ‘만들어가는 영화제’, ‘수평적 영화제’로서 참여를 이끄는 역할이라면, 동네방네비프는 ‘지역 맞춤형 영화제로 뿌리내려 해양수도 관광콘텐츠 개발’로 확장하길 희망하고, ‘가을과 겨울이 제철인 해산물도 풍성하게 맛볼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커뮤니티비프 보다 로컬리티를 더 착실히 반영하고자 한다. 이 글은 로컬 정체성 재현에 대한 문제를 비판적으로 다뤄보고자 하므로 동네방네비프를 논의의 중심에 둔다. 5
언급한 두 프로그램의 목적성은 뚜렷한 편이고, 또 일각의 비판을 상쇄시킬 만큼 소정의 성과를 이뤄낸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특히 동네방네비프에 대한 평가는 모순적이다. 동네방네비프는 부산 지역 17개구군의 지정된 야외 장소에 스크린을 설치하여 생활권 내 국제영화제를 선사한다는 목적의 특성상 구청에서 업무를 협력하고, 예산을 지원했다. 북항, 범어사, 해운대 등 장소를 거론하며 ‘우리 동네’에서도 부산국제영화제를 체험할 수 있다는 각 구의 홍보 기사를 확인할 수 있는데, 6장소에 따라 적게는 이틀만 행사를 개최하는 곳이 대부분이었지만 7 그 실효성에 대한 평가보다 일단 유치했다 위주의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일각에서는 부산시 달래기 행사 아니냐는 말이 들리기도 한다. 정작 부산국제영화제 내부에서도 부대행사로 간주하는 위 프로그램은 일명 ‘본진’으로 불리는 해운대구 일대와 달리 실무 영역 내에서도 위계화 되어 있다. 예산, 운영 등 여러 내부적 문제가 있겠지만 행사정보의 양과 접근성도 ‘본진’과 같지 않은 것이 사실이며, 8 또한 국제영화제에서만 만날 수 있는 신작들, 주요 관객 이벤트는 여전히 해운대구에 집중적으로 편성되어 있어 수평적 확대라기보다 중심을 보완하는 차원이다. 나아가 동네방네비프는 이미 여러 영화제 및 미디어 단체에서 진행 중인 지역 순회 상영과 유사한 모델을 BIFF 기간 내에 개최한다는 특징 외에 이렇다 할 고유성도 발견하기 어렵다. ‘우리 동네’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어떻게 생활문화를 영유하는 것과 같은 의미인지, 다만 영화 관람이 어떻게 문화 향유의 격차를 해소한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보다 깊은 논의가 필요한데도, 단기성 행사를 개최한 것으로 각 구 간의 문화적 격차가 해소되었다는 식의 성과 측정은 다소 과잉되어 보인다. 9 나아가 최근 향유자 중심의 주체성과 능동성 등 개인 경험의 관점으로 예술 유형의 비중이 이동하고 있는 경향과는 달리 동네방네비프는 형식면에서는 집단적 관람 즉 전통적인 예술 향유 방식에 속해 여러모로 아쉬운 지점이 있다. 10
브랜딩 가치 면에서도 ‘세컨드’에 그칠 수밖에 없고, 조직 내부의 예산 편성 및 분배 면에서도 만 년 후 순위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한계가 명백함에도, 왜 BIFF가 동네방네비프라는 이름으로 로컬의 재현과 유치에 힘을 쏟아야 하는지 답을 내리기 쉽지 않다. 지자체 보조금 집행 단체로서 그 기능을 오롯이 수행해야 한다는 행정적 의무에 기인한다면, 적어도 먼저 부산이라는 모종의 보편적 문화가 무엇이고 또 이를 어떻게 구현할지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아울러 ‘부산’을 구성하는 로컬 자원들의 피상적, 감상적 재현을 넘어 새로운 문화적 자원들을 발굴하는 데에 그 역량을 우선하여 모을 필요가 있다. 즉 플랫폼으로서, 제도와 시장, 시민의 역량을 매개하고, 특히 로컬 문화 예술인 또는 예술단체를 양성하거나 지원해서 주민을 영화제의 주요한 주체로 승격시켜야 한다. 로컬 담론을 확장한다는 장기적인 비전 내에서 지역 대학의 로컬리티 연구소와 협력하여 정기적인 세미나를 개최하는 것도 좋은 방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상영 장소가 모두 ‘야외광장’인데, 이 또한 보여주기식 행사로 비칠 수 있으므로 각 구의 공공재적 장소에서 영화제를 개최하여 ‘동네’라는 이름에 보다 알맞은 축제로 거듭날 필요가 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칸, 베를린, 토론토와 같은 세계적 영화제로 성장하기를 희망하지만, 국가적 차원의 지지가 미미하고 따라서 성장동력도 위 영화제들에 미치지 못한다. 인건비 상승에 비해 지원 예산은 10년간 동결 수준이라 세계화와 로컬화라는 이중의 과제를 모두 수행하기에는 충분히 힘에 부칠 수 있다. 그리하여 영화제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로컬 재현에 대한 비판적 입론을 설정할 현실적인 여력도 없이 적은 인력으로 행사를 시시각각 쳐 내기에 바빴을 것이다. 그러나 두 역할 모두 피할 수 없다면, 나아가 ‘부산’이라는 장소성에 힘입어 성장을 지속해야 한다면, 동네방네비프를 더욱 로컬 주민의 일상 속에 녹여내는 것만이 해답이 될 것이다. 일례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작은 규모로 개최된 ‘마을영화만들기’ 11와 같은 프로그램은 일상적 매체로서의 영화의 확장성을 도모하고, 나아가 지역민이 로컬 자원의 직접적인 생산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롭고, 유의미한 프로그램이었다. 이와 같은 프로그램의 확장을 위해 사무국은 집행 예산을 분배하여 운영을 이원화하고, 나아가 로컬리티를 구성하는 문화적 자원을 어떻게 모아내고, 발굴할 것인지에 대한 조직 내부의 고민과 함께, 지역 영화인과 문화예술인이 중심이 되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끌어내야 한다. 27년 전 BIFF의 태동이 그리했던 것처럼 말이다. BIFF는 경계 없는 예술의 전유, 그 유연함이 선사하는 세계 시민으로서의 감각을 일깨워주는 전례 없는 국제 행사다. 그 역할과 책임의 무게를 고려한다면, 로컬 자원들을 손쉽게 결합하는 방식이나, 단기적이고, 답습된 재현만으로는 영화제의 가치가 배가될 수 없다는 점을 아울러 인식해야 할 것이다. [ ]
박숙희 (문화기획자)
제 27회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 2022년 10월 5일 수요일 - 10월 14일 금요일
상영관 : 7개 극장 30개 스크린
상영작 : 총 353편
* 이미지는 필자에게 제공받았으며, 출처는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www.biff.kr)입니다.
- 문화적 정체성으로 명명하기보다 문화적 ‘자원’의 ‘간극’으로 담론을 수정하자는 논의는 프랑수아 줄리앙, 『문화적 정체성은 없다』를 참고하길 바란다. 프랑수아 줄리앙, 이근세 옮김, 『문화적 정체성은 없다』, 고유서가, 2020. [본문으로]
- 위의 책, 127p. [본문으로]
- 「2021 영화진흥위원회 국제영화제 평가보고서」, 499p. [본문으로]
- 위의 보고서, 524p. [본문으로]
- 2022 커뮤니티비프 카탈로그 자료의 소개글 참고. [본문으로]
- 『GNA글로벌뉴스통신』, "부산 북구, 주민과 함께한 부산국제영화제 '동네방네 비프' 성료", 2021.10.16. 『국제신문』, "동래구 복천고분군에서 '동네방네비프' 영화 상영 外", 2021.10.15. [본문으로]
- 해운대는 8일, 진구는 7일, 동구 5일, 중구 3일, 그 밖의 12개 구는 이틀간 행사를 개최했다. 홈페이지 참조. http://community.biff.kr/kor/ [본문으로]
- 『부산일보』, “[BIFF] 범어사에 펼쳐진 대형스크린...‘동네방네비프’가 만든 이색 야외극장”, 2022.10.12. “개인적으로 장소 선정이 아쉽고, 홍보도 덜 됐다고 생각한다. 영화 시작 시간을 찾는 것도 어려웠다”는 시민 인터뷰 내용 참고.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22101209351167709 [본문으로]
- “부산의 도시 전체가 영화제 행사장이 되는 장관을 연출하고, 활력을 선사하여 재생의 기반을 구축하며, 사람사는 영화도시로의 균형 발전을 기대”한다는 자체 평가와는 달리 “지역민에게 직접 다가가는 실효성은 부족하다.”는 상반된 평가 참조. 「2021 영화진흥위원회 평가보고서」 423p, 523~524p. [본문으로]
- 조현성, 최보연, 『예술향유정책 분석 및 방향 연구』,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정책연구, 2020.8. [본문으로]
- ‘마을영화만들기’는 영화의전당-유네스코영화창의도시 부산, 도시재생지원센터, 영화제 간 협업에 의해 로컬 주민이 단편을 만들고 영화제 기간에 상영회와 관객과의 대화의 주인공이 되는 프로그램이다. 홈페이지 및 카탈로그 자료 참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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