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11일부터 2020년 1월 31일까지 인천 중구 PARADISE ART SPACE에서 <랜덤 인터내셔널 : 피지컬 알고리즘>이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처음 전시의 타이틀을 보았을 때, 편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랜덤 인터내셔널? 피지컬 알고리즘? 일단 ‘랜덤 인터내셔널’이란 아티스트 그룹명인 것은 알겠다. ‘피지컬 알고리즘’은 그 사전적 뜻부터 찾아보았다. 피지컬은 인체의/물체의/자연법칙상이란 뜻이고, 알고리즘이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절차, 방법, 명령어들의 집합이라 한다. 너무나도 이과적인 단어들이다. 이 개념들이 현대미술을 만나 과연 어떤 작품으로 구현된 것인지 상상하기 어려워 전시 설명을 미리 찾아 읽어보았다.
"디지털 기술 발전을 넘어 디지털 환경 속 인간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오늘날 포스트 디지털 시대에 랜덤 인터내셔널: 피지컬 알고리즘展은 기술과 인간의 대화가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 묻는다. 랜덤 인터내셔널은 2005년 한네스 코흐(Hannes Koch)와 플로리안 오트크라스(Florian Ortkrass)가 결성한 아티스트 그룹으로, 런던과 베를린에서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은 다양한 분야의 팀과 협력하여 감성적이면서도 강렬한 신체적 경험을 이끌어내는 실험적인 작품들을 선보여 왔다. 관람객의 존재를 은유하거나 즉각 반응하는 작품들은 물리적 실재와 디지털의 허상, 존재와 사라짐, 인간과 비인간 등의 추상적 개념을 기술적 효과로 아름답게 풀어낸다. 랜덤 일터내셔널의 작품은 ‘조응:바라보기, 모사:따라하기, 개체:독립체 단계’로 확장하는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만날 수 있다."
이 설명문을 읽으면서 든 가장 큰 의문은 ‘포스트 디지털시대’란 어떤 시대상의 정의인지였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디지털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인간을 위한 따뜻한 기술과 수평적 네트워크의 진화, 공동체 문화의 확산으로 아날로그적 가치를 되살리는 젊은 세대를 의미하며, 디지털 환경과 문화 속에서 성장하면서 디지털 기기와 매체를 자유롭게 활용해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적극적으로 표출해왔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또 이 시대의 사람들은 차가운 기계적 디지털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아날로그적 감성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전시의 사전 정보를 이해하기 위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의 답을 찾아보면서 현대미술 비전공자이자 이과적 개념에 약한 내가 과연 이 작품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복잡한 심경으로 전시장에 들어섰고 첫 작품을 대면하자마자 나의 걱정들은 지나친 기우였음을 알았다.
전시는 넓은 로비에서부터 시작된다. 64개의 거울로 제작된 Audience를 필두로 그 뒤편에는 거대한 캔퍼스로 관람객을 투영했다 사라지는 Presence and Erasure가 설치되어 있다. 데스크를 지나 들어간 안쪽 공간에는 겹겹이 포개진 유리판에서 빛의 무리가 유영하고 있는 Swarm Study가 있으며, 그 오른편에는 센서를 이용해 관람객에 반응하여 움직이는 200개의 거울조각으로 이루어진 Fragments가 있다. 검은 장막을 지나 어두운 방에 입장하면 관람객의 움직임을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디지털 이미지 작품 Aspect(White)가 있다. 밖으로 나가면 36개의 빛줄기의 움직으로 표현되는 Small Study, 아주 작은 빛 점들이 모여 관람객의 형태 및 움직임과 유기적으로 반응하는 Our Future Selves, 특수 페인트 스프레이를 사용하여 관람객이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Temporary Graffiti가 순서대로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14개의 빛점들이 바닥에 설치된 레일을 따라 천천히 나아가며 인간의 걷는 모습을 모사하는 Fifteen Points II가 단독으로 전시되어 있다. 최소한의 요소로 인간의 형상을 직관적으로 표현한 이 Fifteen Points II는 2층 전시공간에 맞춰 제작되어 한국에서 최초로 공개한 것이라 한다.
이 10개의 작품들은 전시설명에서 밝히고 있듯이 조응·모사·개체라는 3개의 키워드로 구분할 수 있다. 조응은 자신의 이미지를 관찰함과 동시에 관찰 당하는 경험을 주는 Audience, Fragments이다. 모사는 기하학적 형상, 빛, 특수 페인트 등으로 관람객을 따라하는 Our Future Selves, Presence and Erasure, Aspect(White), Temporary Graffiti이다. 마지막 개체는 독립체 단계에서는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은 움직임 속에 인간의 행동 패턴을 표현한 Swarm Study, Small Study, Fifteen Points가 속한다. 각 작품들은 독립된 공간을 보장받고 있어 관람객은 작품과의 교감에만 집중할 수 있게 배려한 전시구성이 좋았다.
이 전시의 감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사람과 디지털의 예술적 소통이라 말할 수 있다. 내가 전시장에 들어서마자 가지고 있던 두려움을 버리고 작품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즉각적인 즐거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함께 간 16개월 된 딸아이도 작품들에 바로바로 반응하며 박수치고 즐거워했다. 피지컬 알고리즘展은 눈으로만 감상하는 전시가 아니라 신체 모든 부분을 사용하여 참여하는 전시다. 작품들은 마치 관람객들에게 자기를 봐달라고 말을 거는 것만 같다. 관람객과 대면하고 상호반응하면서 생기를 얻고 비로소 완성되는 것 같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로 이루어진 이 작품들이 사람을 바라보면서 관찰하고(조응), 따라하며(모사), 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최종적으로는 독립된 예술로 승화하고 있는 과정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의 본능과 지각에 따른 신체적 움직임을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투영하여 예술로 이끌어 낸 이 작업방식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사실 예술과 최첨단 과학을 접목시켜 관람객의 참여를 도모하여 상호작용의 폭을 확장하는 ‘인터랙티브 아트’가 시작된지는 꽤 오래됐다. 하지만 인터랙티브 아트가 관람자의 주체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인 것과는 다르게, 이 피지컬 알고리즘展의 작품들은 처음부터 그 목적성이 다르다. 랜덤 인터내셔널의 작품들은 포스트 디지털 시대상을 표현하기 위한 창작물들로 인간과 교감하는 순간을 예술로 표현하고, 최종단계에서는 사람과의 교감 및 소통을 넘어서서 디지털 기계 그 자체가 예술로 탄생했다.
한편 사람과 디지털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작용 및 교감들이 결국 작가가 예상하고 있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람객이 만들어 내는 예상치 못한 엑시던트나 다수의 관람객의 동시참여 등 재밌는 상황들을 유연하게 반영할 수 있다면 더 풍성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전시장을 나오면서 현재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랜덤 인터내셔널 : 아웃 오브 컨트롤'도 관람해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 ]
남해인
전시: 랜덤 인터내셔널 : 피지컬 알고리즘
기간: 2019.10.11 - 2020.01.31
작가: 랜덤 인터내셔널(한네스 코흐, 플로리안 오트크라스)
장소: 파라다이스 아트 스페이스
*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했으며, 사용 허가를 받고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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