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기억이지만 생생하게 떠오르는 몇 개의 장면들이 있다. 물이 갈라지며 새로운 땅이 나타났던 제부도, 보석인 줄 알고 어머니에게 선물한 감포 바닷가에서 주운 눈부시게 반짝이던 유리 조각, 주변 철물점에서 사 왔던 우리 집 백구 아롱이의 새로운 보금자리. 어지럽게 산재해 있던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의 전시를 통해 이렇게 모이게 될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2021년 인천아트플랫폼의 첫 기획전시인 《간척지, 뉴락, 들개와 새, 정원의 소리로부터》는 더는 미룰 수 없는 ‘생태환경 보존’과 피할 수 없는 ‘기후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인천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인천아트플랫폼 B 전시실 벽면에 재생되고 있는 ‘찰스 림 이 용(Charles Lim Yi Yong)’의 <씨 스테이트(SEA STATE)> 프로젝트는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간척의 현장을 드론을 이용해 가감 없이 보여준다. 간척사업은 대체로 바다를 높디높은 펜스로 가린 채 진행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두 눈으로 그 현장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불편한 것은 가리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영상 속 바다에 뿌려지는 헤아릴 수 없는 양의 모래를 보고 있으면 자연의 형태마저도 바꿔버리는 국가의 힘 앞에 개인은 일종의 무기력에 빠지게 된다. 더 무서운 건 특정한 공간에 채워지는 모래를 보고 있으면 예술적 황홀경이나 정돈된 규칙성에 의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점이다. 자연을 인위적으로 바꾸는 것에 대한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최후의 양심은 이미 우리의 유전자 속에서 사라져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국가가 특정한 장소에 막대한 양의 모래를 들이부어 땅을 다지는 것이 간척사업의 일반적인 형태지만, 전 세계 곳곳에서는 개인 주도의 간척사업이 매우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다. 아트플랫폼 B 전시실에 설치되어있는 '장한나'의 <신 생태계>가 이를 보여준다.
수조 3개에 해양생물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암석과 부표 등이 공간에 채워져 있다. 부표는 외형 그대로의 모습이라 해양에 버려진 쓰레기라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암석들은 원래 그 자리가 고향인 듯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인공물인 플라스틱이 변형된 것으로 장한나 작가는 이를 ‘뉴 락(New Rock)’이라 표현한다. 인간이 인지하지 못한 채 바다로 내보낸 플라스틱들이 드넓은 바다를 다 메우진 못해도 바다를 오염시키고 해양생물의 터전과 목숨을 빼앗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인들은 개개인이 간척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태평양에는 한반도 면적의 7배에 달하는 쓰레기 섬(GREAT PACIFIC GARBAGE PATCH)이 생겼으니 이미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국제적 생태환경 포럼을 개최하여 ‘탄소 제로’ 등의 정책적 해결 방안을 마련하는 것은 지금의 상황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세계 각 정부와 다국적기업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민간의 영역에서는 국제 포럼, OO 선언, 탄소 제로 등은 삶에서 피부로 와닿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수조 속에 있는 ‘뉴 락’을 플라스틱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체험이 개개인에게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생태환경이 예술을 만나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장한나 작가가 수집한 뉴 락을 표본화한 작업과 사진 연작 <기묘한 낯선> 그리고 채집하여 작업하고 연구하는 공간을 구성한 <뉴 락 연구자의 작업실>은 윈도 갤러리 형태로 E3 전시실에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권도연’의 <북한산>과 <비숲>은 B 전시실의 1층과 2층에 거쳐 전시되어 있다. <북한산> 시리즈는 재개발 사업으로 인해 보금자리에서 버려져 북한산을 떠도는 존재가 되어 버린 들개의 사진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인간의 주거 복지를 위한 재개발 사업이 또 다른 생명체에게는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본래의 이름을 잃은 ‘들개’의 모습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
<비숲>은 작가가 까마귀 떼를 관찰한 사진과 영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2017년 즈음 고향인 경주에서 일할 때, 갑자기 나타난 엄청난 수의 까마귀 떼를 마주한 적이 있다. 그들이 보여주던 군무의 경이로움과 그들의 울음소리가 주던 공포는 아직도 뇌리에 깊게 박혀있다. 겨울철 까마귀 떼가 갑자기 우리나라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은 지구온난화로 인해 시베리아에서 일본까지 가던 까마귀들이 가까운 한반도에서 월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간은 앞선 <신 생태계>와 <북한산>에서 본 것처럼 해양·육지생물의 주거권을 빼앗고 있고, <비숲>처럼 조류의 서식지도 바꿔버리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폭력적 창조에 의해 희생되는 것들에 대해 우리는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한다.
이외에도 ‘김화용’ 작가의 <집에 살던 새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는 인간의 주요 식량이 되어버린 ‘가금류’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박진아’ 작가의 <2011 후쿠시마>와 <화이트>는 재난이지만 예견된 인재인 두 사건을 담담하게 하지만 냉정하게 표현해냈다.
‘타니아 칸디아니(Tania Candiani)’의 <동물을 위하여>는 여섯 종의 동물 소리, 암반층의 소리를 통해 ‘동물들을 위한 자장가’로 사용했으며 작가 자신이 편집하여 만든 기계음과 목소리, 텍스트와 중첩하여 동물·지질·기계가 내는 소리의 공명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과정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감상할 수 있는데, 인간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비인간인 존재들에게는 폭력적인 소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의 전환으로 다가온 작업이다.
야외 전시장에는 ‘남화연’ 작가의 <새로운 쾌락은 오래된 경계심과 같다>가 구성되어 있는데, 개화 시기와 식재 종류가 서로 다른 꽃을 심어 개항장의 장소성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인간과 비인간의 생태적 공존이라는 특성을 부여하였다. 정원에서 전시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작가의 <필드 레코딩>이 설치되어 있는데, 새의 울음소리를 녹음하여 이를 모방하는 퍼포머의 모습을 아카이빙한 영상이다. 자연의 소리를 듣는다. 모방하여 소리 낸다. 모방된 자연의 소리를 듣는다. 이 과정을 반복하여 인간과 자연의 끊을 수 없는 연결고리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든다.
G1 전시실에는 ‘리우 창(Liu Chuang)’의 <비트코인 채굴과 소수민족 필드 레코딩>이 상영되고 있는데, 폐기된 수력 발전소, 비트코인 채굴장, 소수민족이라는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대상에서 어떤 연관성과 시사점을 찾을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또한 G3 전시실에는 요일, 시간별로 ‘찰스 림 이 용’의 <씨스테이트식스>, ‘카라빙 필름 콜렉티브(Karrabing Film Collective)’의 <언어들 또는 이상한 나라의 에이든>, ‘주마나 마나(Jumana Manna)’의 <와일드 렐러티브스>, ‘파브리지오 테라노바(Fabrizio Terranova)’의 <도나 해러웨이: 지구 생존 가이드> 등 4개의 작품이 교차 상영되고 있다.
《간척지, 뉴락, 들개와 새, 정원의 소리로부터》는 사람이 자연을 바라보는 전시가 아닌, 자연이 사람을 바라보는 전시였다.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상처 입은 자연이지만 그럼에도 함께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따스한 시선으로 알려주는 오히려 자연이 인간을 위로해주는 전시였다.
지구 반대편의 사람과 실시간으로 대화할 수 있고, 우주에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정거장을 지을 수 있을 정도의 과학기술력을 가진 인간은 그 기술력으로 폭력적 창조를 거듭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인간만을 위한 발전과 개발은 멈춰야 한다. 팬데믹의 시대가 자연이 우리에게 허락해주는 마지막 선택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경고를 무시하지 않고 ‘공생적 창조’로 노선을 변경해야 할 것이다. [ ]
정효민
간척지, 뉴락, 들개와 새, 정원의 소리로부터
기간: 2021.5.21. - 2021.7.25.
장소: 인천아트플랫폼 B, E3, G1, G3 전시실 및 야외
작가: 권도연, 김화용, 남화연, 리우 창, 찰스 림 이 용, 주마나 마나, 박진아, 장한나, 카라빙 콜렉티브, 타니아 칸디아니, 파브리지오 테라노바
기획: 김현진
참고: 인천아트플랫폼 2021 기획전
*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했으며, 사용 허가를 받고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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