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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작금 공공미술에 대한 단상

by 동무비평 삼사 2021. 8. 29.

프롤로그

얼마간, 작년과 올해 시행했던 우리동네 미술프로젝트(공공미술 프로젝트) 백서들과 관련 자료들을 찾았다. 자료들은 주로 경기도와 그 주변부, 서울과 인천 프로젝트를 담고 있다. SNS에 올라오는 프로젝트의 과정 포스팅도 조금 보았다. 이 일에 열심을 다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에게 그리 관심의 대상도 아니었지만, 미워하기도 민망한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론은 안타깝고 불편한 심기를 마주하게 되었다는 것과, 민망한 선입견의 정체가 조금 더 확실해졌다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예술에 대하여 확정하고 싶지 않은 이 마음은, 실낱같은 무언가를 갈구하기 때문인 듯. 희망보다는 매우 미미한 그것을 향해 그냥 애증어린 불평을 해 본다.

 

불평들

2021년 현재, 여전히 공공미술은 공공성에 대한 질문이 없고 공공에 대한 예의도 없다. 공공함의 사회적 합의가 공공한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개인의 삶을 살아내는 미시적 정치적 행위가 왜 공공을 향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도. 그것이 우리가 생활의 현장에서 열심히 그리고 치열하게 일하다가 뛰어나가 들었던 촛불같은 공공성에 대한 최소한 도리에 대한 질문이 필요할 터.

 

잠시 생각해보니 비슷한 이유로 삶의 도구였던 서민의 삶과 손때가 묻은 사물들이 예술가에의해 재해석되고 해체되어 목적성을 갖고 재조합되었을 경우, 이 사물들이 작가가 다루는 재료 이상 가치를 갖기 위해서 공공성에 대한 작가적 문제의식이 더욱 첨예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이렇게 관계형 공공미술이란, 늘 이런 방식의 질문이 필요하다. 작가의 윤리적 태도야말로 공공예술을 가치 있게 만드는 처음이자 과정이고 그 끝이다. 그 작가가 무엇을 다루든.

 

시민 참여형 공공미술은 작가가 만든 가이드라인을 넘어서는 위법과 위반을 허용하지 않는다. 색칠 공부의 선에 갇힌 시민의 상상력과 실천력을 참여라고 부른다면, 자율성이란 허울 좋은 자기검열이 될 뿐, 우리는 이런 민주주의에서 사는 것이 너무 익숙하다.

 

거리의 돌덩이 쇳덩이, 낙후된 골목의 벽화에 대한 공공성을 물으니 공공성은 슬그머니 시민과 주민을 볼모로 잡기 시작했다. 시민 참여형 공공미술은 교육 프로그램이란 명분과 체험형 이란 방법으로 원데이클래스용 우아한 키트를 양산한다. 시민 수혜성을 강조하며 공공미술 코스프레하면서, 역시 공공에 합당한 수혜자 수를 정량적으로 셈한다.

 

도대체 지금 공공미술에 동시대성은 없다. 지역성을 강조한 공공미술은 전통과 역사에서 그 내용을 가져온다. 늘 그런 식이다. 그런 방법은 지역을 리서치하면서 유일하게 자랑할 만한 상투적인 가치가 되었다. 그 가치 속에는 오늘을 사는 김씨가 박씨도 이씨의 삶은 없다. 동시대 다양성의 삶을 지우거나 소외시킨 공공미술은 전체주의의 표상일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생활이 되어야 하고, 쌀이 되어야 하며, 자식의 학비가 되어야 한다. 예술과 삶을 살아내는데 있어서 예술을 사용하는 것이 무엇이 부끄럽고 무엇이 잘못이 될까?

 

벽화가 쇼윈도우 갤러리 액자 속으로 들어가도 그림이 장식이 되는 이상을 뛰어 넘지 못한다면, 공공성을 획득하기 어렵다. 그저 환경 미화의 버전 업으로 도구적으로 활용될 뿐.

 

공공미술은 어쩌다 자꾸 쉼터나 치유센터, 혹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 가는가? 조악한 캐릭터 인형이 사람을 반기는 공간, 누울 수 있는 해먹과 의자가 설치된 공간의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물론, ‘우리동네 미술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예술인 일자리 제공 및 주민 문화향유 증진을 목적으로 하며, 문화체육관광부와 00도가 주최하고 00시와 00문화재단이 주관하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협력하는 공공프로젝트이다.

 

무늬만커뮤니티가 서울 동부 이촌동 강변도로의 소음 가림막에서 작업한 지우는 드로잉. 강변도로의 소음 가림막에 쌓인 먼지를 지우개로 지우는 작업. 2015

 

모든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사회적 역할과 성과, 기능적 효용성을 향한다. 도대체 자기 자신을 위한 이기적 마음이 없다. 공공의 선을 향하고 있는 미술의 혐의가 딱 이렇다. 이것이 첫 번째 혐의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으며, 왜 이것을 실행하는지에 대한 질문과 문제의식이 부재하다. 아니 부재하기보다 답이 정해져 있다. 정해진 정답 때문에 공공미술의 혐의는 불온하다. 이 불온한 선동을 조장하고 복무한 문화체육관광부와 지자체와 작가들은 모두 공범이다.

 

두 번째 혐의는 참여라고 불리는 관제적 동원력과 사회적 약자를 참여 대상으로 하는 위계성이다. 타자의 삶에 무책임하게 개입하고도 잘못을 인지하지 못하는 무지함과 더불어, 막연하게 인지되는 관계성의 전방위적 방향을 일방통행으로 만들어버리는 폭력을 선한 영향력으로 만드는 기만적 행위다. 참여자도 속이고 나도 속이고 사회도 속이는 모두까기가 어떻게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 놀라운 일이다.

 

속도, 이 속도감의 동일함이 평등함인가?

 

편견이 풀리고 상대를 이해하게 하는 은혜롭고 거룩한 프로그램.

 

긍정의 눈으로 보면 긍정이 부정의 눈으로 보면 부정이 보인다. 그런데 왜 부정의 눈만 자꾸 입력 신호를 보내는지?

 

프로그램을 위해 강제로 호명된 기억들이 소모되는 방식, 이제 공공미술은 모두의 기억을 호명하여 소비하는 소비적 미학에 기반을 둔다. 전국 모든 할머니들은 서툰 글씨로 시를 쓰고 전국 재래시장은 똑같은 아케이트 지붕과 주차장을 갖는다. 걷는 속도를 참지 못하는 다급함을 공공성이라 부를 지경이다.

 

장애인과의 협업적 결과가 매우 조형적으로 시각 중심적인 결과물이 되었을 때, 협업의 속도가 한시적인 지원 사업의 속도로 진행될 때, 결국 장애는 또 대상이 된다.

 

아!!! 자꾸만 사회적 속도에 제어되는 예술을 어떻게 해야 할까?

 

에필로그

불평을 아무렇게나 쏟아내고 무언가 새로운 다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즈음 이 불평의 본질을 확인시켜주는 반가운 활동과 포스팅을 보았다.(이 활동과 포스팅의 실체나 프로젝트의 제목을 명시하지 않겠다.) 물론 훨씬 날라리 수준의 불평을 일삼던 내 수준과 판이하게 다른, 세심하고 진중한 성찰과 수행의 을 목도한 의 심정으로 그들을 응원하고 싶다. 그들은 공공성을 현재적 삶을 살아내는 개인의 문제로부터 출발했다. 그들의 공공함은 프로파간다나 캠페인이 아니고 실천과 수행에 있으며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온통 시선과 관점이 자신 그리고 주변과 우리 내부를 향하고 있다. 사회적 솔루션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공공함으로부터 공공성을 획득하는 방식은 내가 그들의 활동을 읽어내는 불경한 방식일 뿐 실제 그들은 그저 그들의 삶을 살 뿐이다. 분명 그들이 상정하는 공공과 예술은 지금까지 불평과는 다른 결이다. 나는 그 결에서 실낱같이 갈구했던 미미한 공공의 를 만났고, 진심으로 감동하며 박수를 보낸다. [ ]

김월식

 

 

* 본 글은 문화체육관광부 국비 지원 사업 2020 공공미술 문화뉴딜 프로젝트 <우리동네 미술>에서 경기 지역 현장에 관한 필자의 리뷰입니다.   

* 이미지는 무늬만커뮤니티가 제공했으며, 사용 허가를 받고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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